[중앙시평] 우리는 마음이 그려낸 세계를 본다

2023. 2. 10.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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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진 고려대 반도체물리학 교수

아직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 우리는 바이러스와 힘들게 싸워야 했다. 이런 상황은 바이러스나 세균이 내 몸에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그게 좋을까. 물리학 기초 실험에서 나오는 오차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간단한 예가 1㎝와 1.0㎝는 다르다는 것이다. 1㎝는 ㎝ 간격의 눈금자로 잰 수치고, 1.0㎝는 ㎜ 간격의 눈금자로 잰 수치다. 정밀도가 다르다. ㎝ 간격의 눈금자로 길이를 재면 1㎝ 미만의 간격을 측정할 수 없다. 정밀하게 측정한 것처럼 보이려고 2.3㎝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잘못이다. 측정치를 믿을 수 있으려면 측정 장치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이에 따라 1㎝는 0.5㎝ 이상 1.5㎝ 미만이고, 1.0㎝는 0.95㎝ 이상 1.05㎝ 미만을 의미한다.

「 관찰엔 측정 도구의 한계 수반
붉지 않은 사과가 붉게 보이듯
대상 자체를 본다는 건 불가능
모든 걸 볼 수 없어 오히려 다행

경험과학(empirical science)에서는 대상을 관측해야 한다. 물리량을 측정하는 측정 장치에는 모두 고유의 정밀도가 존재한다. 무한히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같은 대상이라도 어떤 정밀도의 측정 장치를 쓰느냐에 따라서 측정치가 달라진다. 자연과학이 정확하다는 것은 이 오차범위 안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대상을 다루는 자연과학이라도 측정치가 대상의 속성만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측정 장치의 정밀도에 따라 달라진다. ㎝ 자로 재면 1㎝고, ㎜ 자로 재면 1.0㎝다. 이처럼 우리가 보는 대상은 대상 자체가 아니다. 먼 산에 있는 나무를 셀 수 없는 것도 우리 눈이 사물을 구분해서 보는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이런 한계 안에서 보이는 것이고 이런 한계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대상 자체를 볼 수 없다는 것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다행이기도 하다. 우리 손에 묻어 있는 세균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가는 심각하다.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는 그 많은 세균을 일일이 제거하거나 대응하려고 한다면, 밥 먹고 잠 잘 시간도 부족할 것이다. 세균과 싸우기 위해 사는 꼴이 된다.

알고 보면 우리 몸에는 우리 몸의 세포 수보다 훨씬 많은 세균이 살고 있다. 소화기관에 사는 100조 개가 넘는 장내 세균은 볼 수 없다 하더라도, 각막이나 피부에 붙어 있는 세균이라도 볼 수 있게 된다면 이건 아주 끔찍한 일이 된다. 앞에 있는 사람이 온통 세균 덩어리로 보일 테니까. 사실이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건 안 보는 게 낫다. 그게 안 보이니까 살 수 있고 그게 안 보이니까 행복할 수 있다.

유해한 세균이 몸 안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그건 그냥 면역체계에 맡기면 된다. 일일이 확인하지 않는 게 훨씬 낫다. 너무 모르는 게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너무 많이 알아도 좋은 일은 아니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를 볼 수 없고 먼 산의 나무를 셀 수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대상 자체를 볼 수 없다는 데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이는 거리나 크기와 상관없이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느냐와 관련되며,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보느냐와 관련된다. 내 앞에 놓인 사과가 빨갛게 보이는 감각 경험을 살펴보자.

사과를 본다는 것은 사과에서 파장이 7000 옹스트롬(1 옹스트롬은 100억분의 1m)인 빛이 나오면서 시작된다. 이 빛이 내 눈의 수정체를 거쳐 망막에 도달하고, 망막에 가해진 자극이 시신경을 타고 대뇌에 전달된다. 이 자극을 대뇌의 시각중추가 붉은색이라고 판단하면서 본다는 과정이 마무리된다.

우리는 파장이 4000 옹스트롬인 빨강에서 7000 옹스트롬인 보라 사이의 가시광선만 볼 수 있다. X선, 자외선, 적외선, TV파, 라디오파 등의 자극도 시신경을 타고 뇌로 가겠지만, 두뇌의 시각중추는 이런 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다. 이처럼 자연에 존재하는 전자기파의 극히 일부만 볼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으로 한정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대상 자체가 드러나지 않고, 시각중추가 반응하는 것만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적외선을 보지 못하듯이 빨간색을 보지 못하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가 보는 사과의 색은 내가 보는 것과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럼 내가 본 사과의 빨간색은 어디에 있는가? 빨갛다는 건 무엇인가? 과연 빨갛기는 한 건가?

대뇌가 판단하기 전까지 붉은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7000 옹스트롬의 빛과 시신경을 타고 가는 자극뿐이었다. 붉은색은 대뇌의 시각중추가 해석하면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사과는 빨간 게 아니었다. 우리 마음이 그려낸 것이어서, 빨간 게 아니지만 빨갛게 보인 것이다.

시각뿐 아니라 다른 감각도 모두 그렇다. 우리에겐 바닷물이 짜지만, 돌고래는 짜지 않다고 할 것이다. 두뇌가 서로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짜지 않은 바닷물이 우리에겐 짜게 그려진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마음이 재주가 많은 화가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그려낸다고 했다. 일체유심조다.

양형진 고려대 반도체물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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