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겨울 아쉽다면, 눈부신 자작나무 숲으로
제주 서귀포에서도, 충남 태안 천리포수목원에서도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매섭던 겨울의 기세가 꺾였다. 떠나는 겨울이 아쉬우신가. 그렇다면 자작나무를 만나러 가자. 눈 덮인 숲에 새하얀 줄기가 도열한 순백의 자작나무 숲 말이다. 한대지방이 고향이어서일까, 하얀 수피가 눈과 닮아서일까. 겨울 자작나무 숲에선 북방의 정서가 느껴진다. 어쩌면 자작나무 숲은 겨울에 만날 수 있는 가장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풍광이다.
눈밭에 뒹굴고, 인디언 집서 기념사진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를 찾았다. 목적지는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 동홍천 IC를 빠져나가 44번 국도로 접어드니 주변 산이 온통 하얗다. 상고대가 연출한 겨울 풍경이다. 서울의 회색빛에 익숙했던 눈이 갑자기 환해졌다.
자작나무 숲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이젠을 찼다. 자작나무 숲은 주차장에서 3.2㎞, 약 1시간을 걸어 올라야 한다. 자작나무 숲까지 이어진 임도는 눈이 많이 쌓인 데다 곳곳이 얼어 있어 아이젠 착용이 필수다. 설악산 대청봉 가는 차림으로 중무장한 등산객이 있는가 하면, 마실 나온 것처럼 가벼운 차림인 사람도 여럿 보였다. 안내소 앞 상점에서 아이젠을 빌리는 사람이 많았다. 대여료 5000원 중 보증금 2000원은 돌려준다.
주차장은 해발 500m, 자작나무 숲은 원대봉 정상부 해발 약 800m에 자리한다. 고도차 300m 정도면, 서울 아차산(287m)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등산은 질색이라고? 미리 위축되지 않아도 된다. 오르막이 완만해 경치를 감상하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정상부에 닿는다. 자작나무 숲까지 가는 길은 모두 8개다. 겨울에는 안전을 생각해 ‘원정 임도’ 코스 딱 하나만 개방한다.
3~4월은 ‘산불조심 기간’ 숲 폐쇄
출발 1시간 만에 정상부에 닿았다. 방문객 모두 아이처럼 소리쳤다. 눈 바닥에서 뒹굴고, 자작나무를 엮어 만든 인디언 집에서 기념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동남아에서 온 여행객도 많았다. 말레이시아 국적의 친텍완은 “한국의 겨울은 춥지만 정말 멋지다”라며 “자작나무 숲은 환상 그 자체”라고 말했다.
외국인도 찾아오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불과 11년 전에 개방했다. 화전과 솔잎혹파리 떼로 황폐했던 산자락에 1989년부터 산림청이 자작나무 약 70만 그루를 심었다. 어느덧 20m가 넘게 자라 무성한 숲을 이뤘고 한국을 대표하는 생태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2019년 43만 명이 찾았고,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지난 2년간에도 해마다 20만~30만 명이 방문했다.
단체 탐방객이 빠져나가자 숲이 고요해졌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를 차분히 느꼈다. 줄기를 만져보니 화선지처럼 부드러웠다. 가지끼리 부딪치며 탁탁 장작 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득히 먼 북방의 숲, 동화 속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다시 1시간을 걸어 내려왔다. 하산한 뒤에는 막국수 한 그릇 먹는 즐거움을 놓칠 수 없다. 1978년 개업해 3대째 이어온 ‘옛날 원대막국수’가 인근에 있다. 막국수(9000원·사진)에 곰취 수육(2만원)을 게 눈 감추듯 먹었다.
인제 자작나무 숲은 입장료와 주차료를 받지 않는다. 월·화요일에는 입산을 통제하고, 3월 2일부터 4월 30일까지는 산불 조심 기간이어서 숲을 폐쇄한다. 한 달도 안 남았다.
■ 평창 ‘육백마지기’ 양평 ‘방탄숲’ 영양 ‘죽파리’도 가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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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 말고도 멋진 자작나무 군락지가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있다. 덜 알려졌을 뿐 인제보다 더 넓은 자작나무 숲도 있다.
자작나무는 영서 지방에 많이 산다. 춥고 건조한 환경을 좋아해서다. 지난해 10월 개장한 ‘운탄고도1330’ 6길의 태백 구간에 멋진 자작나무 숲이 숨어있다. 오투리조트 인근 ‘지지리골’에 약 20만㎡(6만 평)에 이르는 자작나무 숲이 있다. 1993년 함태탄광이 문을 닫은 뒤 조성한 인공림이다. ‘육백마지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평창 청옥산 8부 능선에도 자작나무가 많다. 자작나무가 빽빽해 풍광은 멋지지만 주차장이 협소하고, 숲의 경사가 급한 건 단점이다.
수도권에서는 경기도 양평군에 자리한 개인수목원 ‘서후리숲’이 유명하다. 방탄소년단이 달력 화보를 찍어 ‘방탄숲’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한 가족이 20년 세월에 걸쳐 30만㎡(약 9만 평) 규모의 숲을 가꿨는데 수목원 정상부에 자작나무 군락이 있다. 입구에서 약 30분 걸으면 자작나무가 보인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동계 휴장 기간이어서 3월부터 이용할 수 있다.
자작나무는 따뜻하고 습한 환경을 싫어하기 때문에 중부 이남에서 보기 어렵다. 그러나 의외로 가장 넓은 자작나무 숲이 경상북도에 있다. 영양군 죽파리 자작나무 숲은 30만㎡ 규모로 축구장 40개 면적에 달한다. 개방된 숲이 6만㎡인 인제 원대리보다 훨씬 넓다. 1993년 산림청이 인공 조림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약 3.2㎞를 걸어야 하지만 거의 평지에 가깝다. 아직 기반시설은 부족하다. 영양군은 방문자센터, 편의시설 등을 점차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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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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