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에 강한 일본'이라는 찬사를 듣는 진짜 이유
[서부원 기자]
배려심 많고 친절한 사람들과 쓰레기 하나 없는 깨끗한 거리, 그리고 소박하고 정갈한 음식들. 20여 년 전쯤 첫 일본 여행 때 상당히 비싼 물가에도 나름 고개 끄덕여지던 일본의 첫인상이다. 극우 정치인들의 반복되는 역사 왜곡과 망언이 분노를 자아내지만, 길에서 만나는 일본인에 대한 인상은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중에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당시 소학교를 지나가다 우연히 목격한 코흘리개 아이들의 재난 대비 훈련 모습이었다. 사실 그때 완강기라는 안전장치를 처음 봤다. 지금이야 우리도 웬만한 건물마다 다 설치되어 있지만, 당시 아이들이 벽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 구마모토성 천수각에서 내려다 본 풍경. 곳곳에 펜스가 촘촘하게 설치돼있는 데다 안전요원들까지 근무하고 있어 관람객들은 동선을 한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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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 7년이면 복구가 마무리됐을 법도 하건만, 그들은 관람 동선을 따라 가설물을 따로 세우는 방식을 선택했다. 철제 트러스(TRUSS) 구조로, 몸이 불편한 관람객을 위해 승강기까지 설치해놓았다. 복구가 완료되면 철거할 테지만, 임시방편이라고 하기에는 적잖은 공력이 느껴진다.
성곽 곳곳에 둘러쳐진 펜스도 눈에 띈다. 아무리 짓궂은 관람객이라도 동선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게 돼 있다. 그냥 출입 금지 팻말과 관람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만 세워놓아도 괜찮을 성싶은 곳까지 강아지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펜스가 둘러쳐져 있다.
그 정도로도 안심이 안 됐던지, 관람 동선 곳곳에 안전 요원이 배치되어 있다. 성 맨 꼭대기의 5층짜리 천수각 안에도 여러 명이 근무 중이다. 경사가 급한 나무 계단 옆에서조차 연신 조심하라며 관람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안전사고가 나려야 날 수 없다는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지금 구마모토성 최대의 볼거리는 철옹성 같은 성벽도, 화려한 천수각도, 가토 기요마사의 신사도, 나아가 근대 일본을 열어젖힌 세이난 전쟁의 역사도 아닌, 관람객의 안전을 최우선에 둔 지방정부의 노력이다. 입장료 800엔(한화 약 7600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일본인의 안전에 대한 강박은 실상 타인을 향한 배려와 관심에서 비롯된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일본인들은 태어나 부모에게서 가장 먼저 듣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공공장소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이가 거의 없는 이유다.
그들은 '아리가또(감사합니다)'와 '쓰미마셍(죄송합니다)'을 입에 달고 산다. 그 말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 건 만나보면 안다. 배려심이 몸에 배어 있는 데다 일상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이 곧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 일본은 주차장마다 U자형의 라인이 그어져 있다. 여닫을 때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두 차 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깨알 같은 배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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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당에 가면 손님이 마음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주인이 주문을 받을 때 시선 가림막을 설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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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는 주인이 식사 주문을 받으면서 손님의 시선이 마주칠 수 있는 곳을 고려해 가림막을 옮겨준다. 다른 손님이 앉아 있는 곳은 물론, 설령 주방이나 계산대를 향해 있어도 어김없이 가린다. 일행 여럿이 함께 마주 앉아 식사하는 경우엔 당연히 가림막을 치운다.
도로 곳곳에 보도블록의 턱을 없앤 것도 인상적이다. 건널목은 물론, 지하철역과 상가, 학교 등 공공기관 주변엔 자전거와 전동 휠체어 등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신호 체계도 보행자 위주인 데다 건널목에 사람이 보이면 자동차는 신호등 색깔과 상관없이 무조건 멈춰 선다.
우리 같으면 인도까지 침범해 주차한 차들로 몸살을 앓겠지만, 걷다가 길을 막아선 차로 불편을 겪은 적은 없다. 한번은 노변에 세워둔 차에 황급히 타면서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내게 미안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린 운전사도 있었다. 불법 주차에 대한 엄격한 단속 때문이라기보다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배려심이 밑바탕에 깔린 본능적인 행동처럼 느껴졌다.
지하철 객실 내에서 자신의 위치와 정차역의 출구를 미리 보여주는 안내판도 돋보인다. 지금 몇 번째 객차에 타고 있고, 어느 쪽 계단이 가까운지, 또 승강기는 어디에 있는지를 그림으로 안내한다. 우리는 다음 정차역과 갈아타는 노선, 내릴 문의 방향을 알려주는 게 고작이다.
이윤만을 위한 자본의 광고 대신 승객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기꺼이 공간을 내어주는 공공성이 부럽기만 하다. 우리는 수익사업이랍시고 정차역에 가까운 기업과 병원, 학원 등을 방송으로 광고할 정도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그 수익이 과연 승객을 위해 쓰였는지는 의문이다.
▲ 당장 도입하면 좋겠다 싶었던 변기 절수장치 모습. 지금 호남지방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어 더욱 눈길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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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식당 내에서 밥을 용량별로 그릇에 퍼담아주는 자판기나 사무실의 도장 찍어주는 기계 등 불필요하다 싶은 물건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의 쓰임새보다 담고 있는 의미와 취지에 주목해야 옳다. 일본인들이야말로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같다.
우리는 일본을 두고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상투적 표현을 쓴다. 제국주의 시절 극악한 식민 지배의 역사를 성찰할 줄 모르는 일본인과 안전의식이 투철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몸에 밴 일본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일본을 향한 온갖 혐오 글이 인터넷을 도배하는 요즘이지만, 미워할 때 미워하더라도 배울 건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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