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사랑의 결정체? 나는 영화 <파이란>을 좋아하지 않는다

류제성 2023. 2. 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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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변의 급진적 책 읽기 26회] 한인정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류제성(변호사)]

 영화 <파이란> 스틸 사진
ⓒ 튜브엔터테인먼트
     
2001년 개봉한 송해성 감독의 영화 <파이란>은 한국에 오기 위해 삼류 건달 강재와 위장결혼한 중국인 여성 파이란의 이야기로 흥행과 비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영화에서 파이란은 청초하고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로 무의미한 삶을 살던 강재에게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강재 역을 맡은 최민식의 연기에 감탄하고 청아한 중국배우 장백지의 매력에 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감동받았었다. 하지만 비록 책을 통해서이지만 결혼이주여성의 현실에 대해,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로는 <파이란>을 그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결혼이주여성을 청초하고 순수한 존재, 남성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영혼을 구원해주는 존재로 그리는 것은 남성의 판타지가 반영된 성적 대상화이며, 구체적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지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이주여성의 상황이 매우 다양해 정확한 통계치를 잡기는 어렵지만, 2021년 기준 약 40만 명의 결혼이주여성이 있고, 이들은 등록외국인 110만 명 중 35%를 차지한다고 한다. 없는 것처럼 치부할 수 없는 많은 숫자임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하고 있다.

그들은 왜 한국에 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충북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 등에서 이주, 페미니즘에 대한 연구와 활동을 하는 한인정이 쓴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는 결혼이주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인권침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 당당히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돈 몇 푼에 시집온 여자들?
 
 영화 <파이란> 스틸 사진
ⓒ 튜브엔터테인먼트
처음 책을 펼치자마자 어느 나라 문자인지 알 수 없는 글들이 나와 순간 불량인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두 페이지 더 넘겨보니 한글로 번역된 들어가는 글이 나온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으로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 회장인 부티탄화가 쓴 글이다.

그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에 이주여성 정책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것이고, 우리의 목소리가 관철되는 그날까지 싸울 것이라는 당당한 선언과 함께 연대해달라는 호소로 글을 시작한다.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매매혼을 하고 한국에서 번 돈을 본국에 송금하는 여자들.'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가장 흔한 편견이다.

세계화로 자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고 고용허가제로 입국할 형편도 안 되는 '가난한 집 맏딸'인 여성들이 가정을 살리고 빈곤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결혼이주를 택한다. 여기에 저출산, 고령화 문제와 돌봄노동 공백 문제의 해결이라는 대한민국 정부의 전략과 상업적 국제결혼 중개업이 결합한다.

이들은 "'돈 몇 푼에 시집온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잘살아 보려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결혼이주여성은 "무급노동인 가사노동, 출산과 육아, 시부모 모시기, 가내노동(농사)를 수행하며 생계비도 벌며 '잘살아 보겠다'는 기획을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개척하는 생존자"이고, "현실의 굴레 속에서 꿈과 희망을 접을 때도 있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생업 일선에 뛰어들어 노동을 수행하는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잘살아 보겠다는 이주여성들의 기대와 꿈은 곧 좌절된다. 이들은 '노는 사람' 취급당하고, 버는 돈은 남편이나 시부모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반말은 다반사이고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존재, 성매매할 수 있는 존재로 취급되는 등 일상적 차별 속에 있다. 엄연한 유권자이지만 이들을 위한 공약 하나 없다.

결혼이주여성은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는 가족을 의미하는 다문화가족의 일원이지만, "자라온 문화, 언어, 전통을 모두 버리고 한국문화에 동화되도록 강제"될 뿐이다. 한국에 왔으니 한국 법만 따르라고 하고 모국어를 못 쓰게 하고 모국의 방송도 못 보게 하고 모국의 음식도 못 먹게 한다.

자신의 자녀와 모국어로 소통하는 것조차 못하게 해 자녀와의 관계는 멀어지고 오해와 갈등이 쌓인다. 중국계 미국인 작가 켄 리우의 단편소설 <종이동물원>에는 미국인 남성과 결혼한 중국인 여성이 낳은 아들이 엄마에게 영어로 말하라며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나 주변의 현실을 반영한, 이주민들이 겪는 보편적인 상황인가 보다. 결혼이주여성의 모국어가 영어라면 이런 대우를 받을까? 우리 안의 인종주의가 낳은 씁쓸한 풍경이다.

한국의 '가부장 문화'를 둘러싼 갈등도 심하다. 우리는 흔히 베트남 등 결혼이주여성 출신국이 못사는 나라라는 이유로 우리보다 후진적이라고 무시하지만, 성평등에서만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자국 문화권에서는 남녀가 동등한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친정을 시댁과 똑같이 대하는데, 한국은 '시댁중심'이고 '가사는 여자가'하는 일이다. 그러나 질문은 금기시되고, 친정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현 가족에게만 충실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가정폭력도 심각하다. 결혼이주여성의 42.1%가 가정폭력을 당한다. 피해자인 여성에게 남편은 너희 나라로 떠나라고 겁박한다. 폭력을 피할 쉼터가 없고 신고해도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경제적 능력 없어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하고 아이 양육권을 뺏길까 봐 이혼을 쉽게 결심하지 못한다.

이주여성들, 함께 일어서다
 
 전북지역 결혼 이주여성들이 28일 오후 익산시청 앞에서 다문화가족에 대해 혐오성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킨 정헌율 익산시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 연합뉴스
그러나 이제 이들은 피해자로서만, 시혜적 조치의 대상으로서만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9년 5월 11일 정헌율 당시 전북 익산시장의 망언이 이들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중국, 베트남 이주민 등 600여 명이 참석한 행사에서 "생물학적, 과학적으로 얘기한다면 잡종강세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똑똑하고 예쁜 애들을 사회에서 잘못 지도하면 파리 폭동처럼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비하 발언이 논란이 되자 그는 "다문화가족 아이들은 머리가 좋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합심하여 잘 키워야 한다는 덕담이 와전된 것 같다"며 인종주의와 편견, 혐오가 섞인 해명을 쏟아냈다.

공적인 공간까지 침투한 혐오에 분노한 이주여성들은 온라인에서 비슷한 사례들을 공유하면서 우리가 살아갈 곳을 스스로 바꾸자는 의지를 다졌다. 2주 뒤 익산시청 앞에 전국 각지에서 온 이주민, 비이주민 시민단체, 일반시민 등 150명이 모여 규탄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주여성이 사상 최초로 집단적으로 뭔가 요구하며 사회에 등장"한 것이다.

이후 이들은 가족의 평화라는 미명하에 이주여성의 인권을 탄압하고 있던 남성 중심의 조직인 다문화가족협의회에 대항해 이주여성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2020년 1월 5일 이주여성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주여성협의회는 당사자 조직으로서, 국민으로서, 유권자로서 당당히 "누군가의 엄마, 며느리, 부인,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주민에 대한 차별 철폐와 인권 보장을 요구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원하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정치인들은 이주여성의 문제를 '가족' 문제로만 보고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도 부모교육, 부부교육 및 상담, 언어교육 등에 그치고 있다. 이주여성들이 놓이는 폭력적인 상황을 개인적 갈등으로 치부하고 고부를 화해시켜 갈등을 무마하는 TV프로그램 <다문화 고부열전>의 방식에서 나아진 것이 없다.

하지만 이주여성들은 더 이상 홀로 당하고만 있지 않기로 결심했다.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함께 일어섰다. 싸우는 여자들로 거듭났다. 이주라는 미명하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에 저항하고 나아가 빈곤, 장애, 퀴어, 여성 등 차별의 교차점에서 마주침을 확장해나가겠다는 고민을 키우고 있다. 더 나은 돌봄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이들의 노력에 함께 할 때이다.
 
 한인정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 포도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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