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대신 ‘가치’를…‘이미지 세탁’ 악용도 [사명 변경의 경영학]

김경민 매경이코노미 기자(kmkim@mk.co.kr) 2023. 2. 9.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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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에 사명(社名) 변경 바람이 뜨겁다. 전통 굴뚝 산업 이미지를 벗고 첨단 기술 기업 이미지를 담으려 영문을 담은 사명을 도입하는가 하면, 아예 업종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간판을 바꾸는 기업도 적잖다. 사명 변경을 통해 기업들은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 걸까.

현대중공업그룹에서 사명을 바꾼 HD현대 경영진이 지난해 말 경기 판교 글로벌R&D센터에서 열린 50주년 비전 선포식에서 임직원들의 응원 메시지가 담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가삼현 한국조선해양 부회장, 권오갑 HD현대 회장, 정기선 HD현대 사장, 한영석 현대중공업 부회장. (HD현대 제공)

기업 사명 변경, 왜

이미지 변신 목적 ‘간결, 심플하게’

사명 변경 유형은 다양하다.

첫째 기업 이미지 변신을 위해 사명을 영문으로 바꾸는 경우다. 지난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현대중공업그룹은 사명을 HD현대그룹으로 바꿨다. ‘HD’에는 ‘인간이 가진 역동적인 에너지(Human Dynamics)로 인류의 꿈(Human Dreams)을 실현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이는 공식적인 의미일 뿐 실상은 ‘중공업’을 빼내 ‘조선 전문 기업’ 타이틀을 벗기 위한 목적이 크다. 지주사 HD현대, 조선 부문 지주사 한국조선해양을 이끄는 정기선 사장은 “세계 1위 십빌더(Shipbuilder·조선사)에서 인류를 위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퓨처 빌더(Future Builder·미래 개척자)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기존 조선, 중공업 이미지를 벗고 ‘첨단 기술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사명부터 바꿨다는 분석이다.

사명을 ‘HL그룹’으로 바꾼 한라그룹도 비슷한 경우다. 한라의 약자면서 ‘Higher Life’ 즉 더 높은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룹명 변경과 동시에 계열사 사명도 줄줄이 바꿨다. 지주사 한라홀딩스는 ‘HL홀딩스’, 자동차 부품 계열사는 ‘HL만도’, 건설사 한라는 ‘HL디앤아이한라’로 각각 변경했다. 지난해 말 설립한 자율주행 전문기업 사명도 ‘HL클레무브’로 정했다.

둘째 좀처럼 업종을 알 수 없는 사명을 도입한 경우도 적잖다.

국내 유일의 동제련소를 운영하는 LS그룹 계열사 LS니꼬동제련은 최근 LS MnM이라는 이름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MnM은 기존의 ‘금속(Metals)’ 사업에 ‘소재(Materials)’ 사업을 추가해 성장세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이 회사는 LS그룹이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는 ‘배전반(배터리, 전기차, 반도체)’의 소재 사업을 담당한다.

대상그룹 계열사 대상에프앤비는 사명을 ‘대상다이브스’로 변경했다. ‘뛰어들다’를 뜻하는 단어(Dive)를 더한 사명으로 식품 기업 이미지와는 무관하지만, ‘고객의 일상 속 모든 곳에서 함께하는 기업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라인 자회사인 라인프렌즈는 IPX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다양한 지식재산권(IP) 경험(eXperience)을 제공하겠다는 의미로, 캐릭터 사업 중심의 기존 라인프렌즈에서 디지털 IP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대기업 중에는 SK그룹이 업종과 무관한 사명을 주로 채택해왔다. SK이노베이션은 ‘혁신’이라는 의미를 사명에 담아 미래지향적이면서 유연한 회사를 강조했다. SK이노베이션이 거느린 주요 자회사 사명도 복잡하다. 정유사 SK에너지, 전기차 배터리 업체 SK온을 비롯해 SK지오센트릭, SK엔무브, SK어스온 등 다양한 자회사를 보유했다. SK지오센트릭은 종합석유화학, SK엔무브는 윤활유, SK어스온은 석유 개발 사업을 하는 기업이다. 사명만 봐서는 좀처럼 어떤 일을 하는 회사인지 종잡기 어렵다. 또 다른 SK그룹 계열사 SK건설도 건설업 이미지를 벗기 위해 ‘SK에코플랜트’로 사명을 바꿨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기업 이름에 에너지, 화학 등이 들어가면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기 힘들다. 과거에는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사회적 가치와 맞지 않을 수 있고, 환경에 피해를 주는 기업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고 강조해왔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산업 경계가 허물어지는 만큼 기존 사업 영역에 제한을 받지 말고 마음껏 신사업을 펼쳐야 한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한화그룹 핵심 계열사인 한화솔루션도 비슷한 사례다. 한화솔루션은 한화그룹의 태양광, 석유화학, 첨단소재 등 주요 부문을 통합해 출범한 회사다. ‘솔루션(해결책)’은 갈수록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주요 사업을 통합해 새로운 솔루션을 제시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한화솔루션은 세계 1위 태양광 사업을 필두로 석유화학, 첨단소재 사업이 고루 날개를 달면서 지난해 영업이익이 1조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한화종합화학도 ‘한화임팩트’로 사명을 바꿨다.

셋째 사명을 짧고 간결하게 ‘단순화’하는 기업도 많다.

유제품 업체 매일유업은 사명에서 ‘유업’을 빼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기존 우유, 분유 매출 비중을 줄이고 디저트, 대체유, 단백질 등 신사업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출산율 급락으로 영유아를 타깃으로 한 유제품 시장 규모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CJ제일제당도 글로벌 종합 식품 기업 도약을 위해 사명에서 ‘제당’을 빼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롯데푸드와 통합한 롯데제과 역시 종합 식품 기업 이미지를 강조하려 새로운 사명 도입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명을 단순화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기아자동차는 자동차를 빼고 기아로 사명을 바꿨다. IT업계에서는 NHN엔터테인먼트가 ‘엔터테인먼트’ 꼬리표를 떼고 NHN만 남겼다. NHN은 게임에서 클라우드,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IT 사업 전반으로 중심축을 옮기고 있다. 넷마블게임즈 역시 게임 회사임에도 게임즈를 뺐다. 게임 이외 다양한 신사업에 뛰어들기 위해서다.

넷째 새 주인을 맞으면서 사명을 바꾸는 사례도 흔하다.

KG그룹 품에 안긴 쌍용자동차는 ‘KG모빌리티’로 새롭게 태어난다. 쌍용차는 1988년부터 유지한 사명을 무려 35년 만에 바꾼다. 주인이 여러 번 바뀌고 판매량이 급감하는 등 부침을 겪는 동안 쌍용차 브랜드 이미지가 악화됐기 때문이다. ‘내연기관차 회사’ 이미지를 벗고 ‘모빌리티 기업’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목적도 크다.

두산그룹 대표 계열사였다가 HD현대그룹 품에 안긴 현대두산인프라코어도 사명에서 ‘두산’을 빼기로 했다. ‘HD인프라코어’ 또는 ‘현대인프라코어’를 신규 사명으로 검토 중이다. 인프라코어는 ‘인프라스트럭처의 코어가 되겠다’는 가치를 반영한 사명이다. 한화그룹이 인수하는 대우조선해양도 사명에서 ‘대우’를 떼고 한화조선해양으로 새 출발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글로벌 기업도 사명 변경 바람

애플, 월마트 등 사명 단순화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2007년 당시 故 스티브 잡스 애플 CEO는 세계 첫 번째 스마트폰인 아이폰을 소개하던 날 기존 사명이던 ‘애플컴퓨터’를 ‘애플’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평범한 컴퓨터 제조 업체에서 스마트 기기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애플 매출의 40% 이상이 컴퓨터였지만 사명 변경 이후 아이폰 중심으로 매출 구조가 바뀌면서 실적이 날개를 달았다. 컴퓨터 제조 업체에서 최첨단 스마트폰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데 사명 변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미국 유통 업체 월마트는 공식 법인명인 ‘월마트스토어즈’에서 스토어즈를 없앴다. 오프라인 매장을 뜻하는 ‘스토어즈’를 삭제하며 전통 오프라인 매장에 국한되지 않고 온라인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을 내세웠다. 스타벅스커피는 스타벅스로, 던킨도너츠는 던킨으로 바꾼 것도 유사한 사례다.

기업들이 잇따라 사명 변경에 나서는 배경은 뭘까.

전통 제조업 이미지를 벗고 신사업을 선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좀처럼 업종을 알 수 없는 사명을 채택하는 것도 하나의 사업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신사업을 벌이기 위한 선제조치로 풀이된다.

문지훈 인터브랜드 한국법인 대표는 “최근 몇 년 새 업(業)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기업이 사업 분야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워지면서 사명 변경이 부쩍 늘었다. 사명을 통해 사업 영역을 얘기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만큼, 기업의 확장된 비즈니스와 지향 가치, 철학을 사명에 담으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LS그룹 계열사 LS니꼬동제련은 사명을 LS MnM으로 바꿨다. 사진은 울산 온산공장에서 신사명 선포식을 개최하는 모습. 왼쪽에서 세 번째가 도석구 LS MnM 부회장, 네 번째는 구자은 LS그룹 회장. (LS 제공)
사명 변경 부작용 우려도

브랜드 가치 악화 주의해야

물론 사명 변경이 반드시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실적이 악화된 상황에서 소위 ‘이미지 세탁’에 악용하는 기업들도 적잖다.

‘쌍용차 인수 먹튀’ 의혹을 받는 에디슨EV는 지난해 사명을 ‘스마트솔루션즈’로 바꿨다. 쌍용차 인수 기대감에 2021년 한 해 주가 상승률이 무려 60배에 달했지만 지금은 거래가 정지돼 상장폐지 기로에 섰다. 자본잠식률 57%를 기록해 스마트솔루션즈의 회생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사명 변경 카드가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한 셈이다. 플랜트 설비 사업을 해온 에이치엘비파워도 ‘티에스넥스젠’으로 사명을 바꿨지만 지난해 3분기 영업적자를 내는 등 실적이 갈수록 악화되는 중이다.

심지어 사명을 두 번 이상 바꾼 코스닥 업체도 꽤 많다. 스포츠 관련 NFT(대체불가토큰) 사업을 하는 블루베리NFT는 사명을 블레이드엔터테인먼트로 변경했다. 이 회사의 전신은 한때 ‘세계 1위 콘돔 제조사’로 유명했던 유니더스다. 2017년 이후 신규 사업에 뛰어들고 인수합병(M&A)을 하면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바이오제네틱스, 경남바이오파마를 거쳐 2021년 블루베리NFT라는 간판을 달았다가 또다시 사명을 변경했다. 물류 장비 업체 수성이노베이션은 EV수성, 수성샐바시온으로 지난해만 두 번 상호를 바꿨다.

글로벌 기업 중에서는 페이스북 사례가 눈길을 끈다. 페이스북은 2021년 ‘메타’로 사명을 바꿨다. 가상 메타버스 사업을 키우겠다는 비전을 담았지만 인지도를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페이스북 브랜드 가치만 떨어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블랙베리도 스마트폰 사업에서 브랜드 가치를 회복하겠다며 사명 ‘리서치인모션’을 버리고 블랙베리로 간판을 바꿨다. 하지만 ‘보여주기식’ 사명 변경에 그치며 결국 스마트폰 사업 중단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목적이 불분명한 사명 교체는 오히려 기업가치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쌓아온 브랜드 이미지가 사라질 우려도 크다. 사명보다 중요한 건 기업 핵심 사업 경쟁력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A대 경영학 교수 조언이다.

사명을 바꾸려면 비용도 꽤 많이 든다. 상호 등기, 상표권 출원, 사옥과 공장 등의 간판 교체에만 많게는 수천억원 비용이 소요된다. 새로 바뀐 사명을 알리고 안착시키기 위한 홍보, 마케팅 전략 변경 등 무형의 비용까지 감안하면 리스크가 결코 적지 않다. 야심 차게 변경한 사명이 소비자 시선을 끌지 못한다면 오히려 고객에게 잊히는 기업으로 전락할 우려도 크다.

오랜 기간 쌓아온 기업가치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만큼 사명 변경에 앞서 새로운 브랜드를 도입해 소비자 반응을 살펴봐야 한다는 의견도 새겨들을 만하다. 식품 업체 샘표는 파스타, 수프 등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폰타나’라는 신규 브랜드를 내놨다.

제품 앞면에 철저히 사명을 숨기고 브랜드 중심의 홍보에만 집중하면서 고급화 전략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폰타나는 국내 크림 파스타 소스 판매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이 사명을 바꾸면 기존 사명에 익숙했던 소비자들이 혼란을 느끼고 브랜드를 불신하게 된다. 이미지 쇄신 명목이지만 그동안 축적해온 회사 신뢰를 포기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만큼 사명 변경에 신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95호 (2023.02.08~2023.02.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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