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감옥 '루피' 짓이었다…日 뒤집은 570억 강도사건 전말
해외에 있는 두목 '루피'가 소셜미디어(SNS)로 '강도·사기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범죄 대상자와 수법 등을 상세히 지시한다→'실행역'을 맡은 여러 명의 알바들이 팀을 이뤄 강도 사건을 벌인다→범죄로 얻은 수익을 해외로 보낸다.
지난 수년 간 이런 수법으로 피해액 약 60억엔(약 576억원)에 달하는 강도 사건을 일으킨 혐의를 받는 일본인 4명이 7일과 9일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강제 송환됐다. 필리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지난 2018년부터 올해 초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30건 이상의 강도·상해 사건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마무라 기요토(今村磨人·38), 후지타 도시야(藤田聖也·38), 와타나베 유키(渡辺優樹·38), 고지마 도모노부(小島智信·45)다. 필리핀에서도 범죄 혐의로 재판 중에 있는 이들을 일본으로 송환하는 데는 양국의 '외교적 결탁'이 필요했다고 8일 아사히신문 등 일본 언론들이 보도했다.
'어둠의 아르바이트'로 실행역 모집
일본에서 '루피 사건'으로 불리는 일련의 범죄가 알려진 계기는 지난달 19일 도쿄(東京)에서 일어난 강도살해 사건이었다. 당시 도쿄 고마에(狛江)시 단독주택에 사는 90세 여성이 지하 1층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고, 시계 3점과 반지를 도난당했다. 경찰은 직후 사건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는 렌트카를 발견해 차 내에서 스마트폰을 입수했는데, 여기엔 '김'이라고 자칭하는 인물로부터 피해자 여성의 주소와 함께 '지하에 현금' '장갑과 모자를 준비하라' 등의 지시가 내려진 텔레그램 메시지가 남아있었다.
이후 체포된 범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루피'나 '김'이라는 '지시역'들에게 범죄 대상과 준비물 등을 전화와 메시지로 전달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루피'는 일본의 인기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이름이며, '김'은 어떤 의미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수사 과정에서 이들이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도쿄는 물론 14개 광역지방자치단체에서 30건 이상 드러났다.
지시역들은 '일당 100만엔(약 960만원)' 등의 고액 아르바이트가 가능하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려 실행역을 끌어모았다. 현재까지 전국에서 체포된 실행역은 약 70명. 경찰은 현역 대학생이나 직장인 등 20~30대 다수가 '어둠의 아르바이트'에 이끌려 이번 범죄에 가담했다고 밝혔다. 일부는 "코로나19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이끌렸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회담 하기 전 송환 서둘러
'루피'와 '김'의 메시지 발신지는 필리핀이었고, 일본 경찰은 필리핀 마닐라 인근에 있는 비쿠탄 이민국 수용소에 수감된 이마무라 등 일본인 남성 4명을 주범으로 특정했다. 이들은 이미 과거에 벌인 특수사기 사건들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는 상태였다.
일본 경찰은 지난 4일 이들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 받아 필리핀에 인도를 요구했지만 필리핀 당국은 처음에 이를 거부했다. 자국에서도 이들이 관련된 형사 사건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일본과 필리핀은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은 외교 루트 등을 통해 필리핀을 압박했다.
해결의 물꼬가 된 것은 9일 도쿄에서 열리는 양국 정상회담이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의 취임 후 첫 방일을 앞두고 필리핀 법원은 이들을 일본에 돌려보내기로 전격 결정한다. "정상회담의 화제가 '루피' 일색이 되면 나라(필리핀)의 이미지가 손상될 수 있고, 일본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려는 대통령의 활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단 우려가 있었다"고 아사히신문은 분석했다.
'루피' 특정 및 추가 범죄 수사
일본 경찰은 이번에 송환된 4명 가운데 '루피'와 '김'이 있을 것으로 보고 필리핀 당국이 압수해 넘긴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15대를 확보해 SNS 메시지 등을 확인할 계획이다. 또 이들이 '루피 사건' 이전에 벌인 것으로 보이는 특수 사기 등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수사를 시작한다.
한편 8일 일본에 도착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은 9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번 회담에서 양국은 안보와 경제, 인프라 정비 등 폭넓은 분야에서의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한다. 회담 후 공동으로 중국에 대한 견제 메시지를 발표할 가능성도 있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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