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집권당의 묻지마 서약
① 학교의 ‘순응 서약’: ‘학업에 충실하고 품행을 단정히 함은 물론 교칙을 엄수하여 학생의 본분을 다할 것이며, 만일 이를 위반한 경우에는 학교의 여하한 조치에도 순응할 것임을 보호자 연서로 서약합니다.’ 2010년 경기도의 한 공립고에서 교사가 수업 태도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학생을 때려 문제가 됐다. 몽둥이로 40여 대의 매를 맞아 시퍼렇게 멍든 학생 종아리와 엉덩이가 공개돼 학교와 교사가 공분을 샀다. 교육청 조사에서 이 학교 학생은 학업에 충실하지 않거나 품행이 단정하지 않다고 교사가 판단하면 ‘여하한(어떤 또는 모든) 조치’에 순순히 따르기로 약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입학 때 보호자와 함께 위 문구가 든 서약서에 서명했다. 교육청은 인권 침해라고 판단했다.
② 기업의 ‘순종 서약’: ‘귀사의 제 규정·규칙과 명령 시달 등을 준수함은 물론 상사의 업무상 명령, 지시에 순응하겠음. (중략) 전근, 전입, 출장, 기타에 관한 귀사 명령에 대하여는 절대 불평함이 없이 순종하겠음.’ 2년 전 노조 측의 폭로로 보도된 경남의 한 부품업체 입사 서약서다. 끝에 ‘집무상 장애를 야기케 하거나 재산상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처벌은 물론 해당 손해액을 지체 없이 배상하겠음’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절대 불평함 없이 순종’이라는 표현까지 담기지는 않았어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서약을 요구하는 회사가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 당시에 널리 알려졌다.
③ 언론사 ‘백지 서약’: ‘만일 위의 사항을 위반하여 회사업무상 장애를 일으키거나 회사에 재산상 손해를 끼칠 경우에는 발생한 손해액을 즉시 청구대로 변상할 것이며 퇴사를 포함하여 어떠한 처벌도 감수할 것을 서약합니다.’ 서약 조항은 9개로 구성돼 있는데 그중 2번은 ‘이동 출장 기타 회사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이고, 3번은 ‘항상 근면 검소한 생활태도를 갖고 인격을 향상시킴은 물론 회사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원으로서 전체 사원의 명예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이다. 지난해 이 서약서에 대한 보도가 나왔을 때 회사의 ‘청구대로 변상’이라는 표현 때문에 ‘백지 서약’으로 불렸다. 이 서약서는 한 언론사의 것이었다. 비난이 쏟아지자 회사는 “폐기 절차를 밟고 있다”고 밝혔다.
④ 스포츠계 ‘노예 계약’: ‘팀원 상호 간 불화합 및 사회적 품위 손상 행위, 각종 대회 성적 부진 등 팀 발전에 저해하는 행동 및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갑’은 직권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경주시 체육회와 소속 선수의 계약서에 들어 있던 문장이다. ‘‘을’은 계약해지 사안에 대하여 일체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 협약서의 어구 해석이 상호 상이할 시에는 ‘갑’의 해석에 따른다’라고도 돼 있었다. 이에 속해 있던 최숙현 선수(트라이애슬론)가 3년 전 팀 감독과 선배의 가혹 행위와 폭행을 고발하는 글을 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방송·연예계에 이와 유사한 계약이 흔했다.
법원은 최근 이러한 계약이 유효하지 않다는 판결을 무수히 내놨다. 부제소(不提訴·공적 이의 제기, 고소, 민사적 배상 청구를 하지 않음) 합의가 포괄적이어서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상식에 비춰봐도 ‘갑질’이다. 이제 본론이다. 국민의힘 서약서를 보자.
⑤ 국민의힘 ‘묻지마 서약’ : ‘서류심사를 통한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 케이보팅, ARS 등 선관위에서 결정한 투표방식에 따른 경선 관리, 경선 결과에 승복하며 소송 제기를 포함한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합니다. (중략) 단 하나라도 어길 경우에는 당에서 결정하는 그 어떤 처분도 수용할 것이며 민·형사상의 불이익을 감수하겠습니다.’ 지난 2일과 3일 전당대회 출마자에게 국민의힘 선관위가 받은 서약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고 한다. ‘그 어떤 처분’이 여기에도 나온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구시대 유물 같은 집권당 모습이 연일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글=이상언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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