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그리운 권사님

전병선 2023. 2. 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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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K 권사님이 허겁지겁 미용실로 들어섰다. 여러 손가락을 붕대로 감고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몹시 초조해 보였다.

“아니, 웬일로 이렇게 여러 손가락을 다치셨어요?”
“아니 글쎄, 아이고 쑤셔라.”

“내가 정신없는 짓을 했어. 빨리 머리 좀 감겨줘요. 허허! 이젠 머리까지 미용실에서 감게 됐네. 나 말이야 끙끙 앓아누웠다가 병원에 가는 길에 머리에서 냄새가 나서 염치없지만 찾아왔어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 알아도 할 수 없구먼.”

당시 종로에서 소문난 재벌댁 사모님이었던 권사님은 많은 사람의 선망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유난히 뽀얗고 통통한 권사님의 손에는 언제나 눈부시게 빛나는 보석 반지가 끼어 있어서 옆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손톱을 다듬을 때마다 “어머, 손이 너무 예쁘셔요.”

직원들이 칭찬하면 권사님은 어린애처럼 순진하게 “이 반지 엄청 비싼 거다. 이게 0000짜리야”라고 곧이곧대로 자랑하곤 했다. 나에게는 꿈같은 액수였다. 그때 그 반지 값을 엿듣고 나니 잠시 상실감이 나를 뒤덮었다. 이런 기분을 흔히 상대적 빈곤이라고 할 것이다. 그 반지가 그렇게 어마 마한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값진 보석이 여자의 신분을 높여 주는 마력을 가진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것 별것 아니야 이런 것 늙어서나 하는 거야!!’ 라고 지혜롭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일로 이렇게 다치셨어요.”
“일하다가 다친 것이 아니야. 헛짓하다가 다쳤어. 미제물건 파는 곳에 손톱 소제하는 기구가 있기에 하나 사 왔지 뭐. 언니들이 손톱 다듬는 것이 무척 쉬워 보이더라고. 돈 들이지 않고 내가 직접 다듬으려다가 이렇게 됐어.”

시어머니가 권하는 일에 며느리가 손을 내밀고 오순도순 고부간에 다정다감했던 순간이었을 텐데,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시어머니의 입장이 무척 난감해진 것이다. 며느리 얼굴을 쳐다보기 민망하다 귀띔해주는 권사님을 귀엽다고 해야 할지….

“어머, 세상에.”

소독도 안 된 기구들로 손톱 주변의 굳은살을 뜯어내다가 여기저기 상처를 낸 모양이었다. 권사님의 손가락 4개뿐 아니라, 며느리의 손가락 3개까지 염증이 생겼는데 지금 2주일이 지났는데도 계속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재벌 사모님이 푼돈을 아끼려고 아등바등한다고 말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자가 근검절약하는 모습, 자신에게 인색하면서도 아깝지 않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사람 사는 형태는 여러 가지다. 자신에게 인색하지만 베푸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있고 부자일지라도 실제 삶은 빈곤 속에 갇히어 사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외제승용차를 소유하고 최고의 명품 의상과 보석을 착용하면서도 여자에게 필수적인 미용비는 낭비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가치관의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내 몸을 가꾸고 돌보는 것을 사명이라고 믿는 이들은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는다. 곧 가장 소중한, 자신을 사랑하고 가꾸며 단아한 생활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 삶의 행복은 대부분 사소한 것에서 나타난다.

K 권사님은 언제나 미용실의 모든 관리비용이 비싸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 디자이너의 손길에서 자신의 모습이 고상하고 멋있게 변하는 것을 실감했을 때는 “그래, 내가 멋지게 변했네! 머리 커트 한번 하고 나면 한두 달이 참 행복해”라고 칭찬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재벌 집안 주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듯 보였다. 회장님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으니 서로 대화가 단절된 상태라는 것이다. 집에 들어오는 그 시간부터 책을 들고 흔들의자에 앉아 가끔 찻잔이나 들여 주는 그런 부부 사이라며 넌지시 하소연하곤 했다.

권사님은 미용실에서 직원들이 정성을 다해 꾸며주면 일어나 직원들 등을 토닥거리며 “자네들이 행복하게 사는 거야. 부잣집이라고, 우리 집에 와 봐라. 한 시간도 머물지 않고 도망갈 거다. 아무런 재미가 없어서….”

그분의 하소연이 지금도 얼핏 떠오르곤 한다. 가끔 직원들에게 권사님이 어렵게 살던 때의 지난 얘기들을 들려주며 근검절약에 대한 본인의 경험담을 얘기할 때마다 나는 그분께 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곤 했다.

어느 날 미용실의 똑똑한 직원 하나가 그 권사님께 전문가 손길의 필요성에 대해 조언을 했다. 손톱뿐 아니라 머리 염색도 집에서 스스로 하다가 눈에 염색약이 들어가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된다고 했다. 절약 정신도 가져야 하지만 여성으로서 미를 추구하고 자신을 가꾸는 데에 투자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고 필수라고, 그것은 자존감을 높이는 것이라고 했다.

특별히 권사님처럼 사회적인 위치에 있는 분들은 품위 유지비라고 생각하시고 신분에 맞게 가꿔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 가꾸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만 내려주신 특권이라고 조곤조곤 말했다.

그날 K 권사님은 그 직원을 호되게 꾸중했다. “그럼 내가 여기 와서 얼마씩을 더 써야 하느냐?”
우리 직원은 “권사님 재발 집에서 손수 하시되 사고만 내지 않도록 하세요. 이렇게 손가락이 곪아 오시니 안타까워서 하는 말입니다”라고 했다.

그날 그 권사님의 일로 직원들 미팅까지 하게 되었다. 권사님이었기에 그날 우리 직원들의 조언에 창피함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음이 분명했다.

명절과 성탄절이 몇 번씩 지나도 자신의 관리자에게 작은 선물 한번 할 줄 모른 분이었는데 어느 날 권사님은 빵을 한 보따리 사 왔다. 그 날 우리 직원들의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피어났다. 그가 손가락을 붕대에 싸매고 나타났을 때 여기저기서 쿡쿡 웃음을 참지 못했던 직원들이 늦게나마 죄송한 맘이 들었던지 권사님 곁으로 다가와 “권사님 감사합니다. 이젠 손가락 통증은 많이 나았지요? 우리 모두 엄청나게 걱정하고 기도했어요. 원장님이 너무 괴로워하시며 기도하셨을 거예요”라고 했다.

“그래요, 김 원장님은 나를 잘 알고 있으니까 더욱 안타까웠을 거야. 부잣집 마나님이 왜 저리 궁상을 떨까 했겠지? 미안해요. 원장님!!”
“아뇨 저도 권사님의 맘 충분히 이해합니다. 새 며느리와 단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려 하신 거죠?”
권사님은 재치있게 “아이코 들켰네”라고 하셨다. 권사님의 순수한 마음이 뿌듯하여 두 팔 벌려 꼭 안아 드렸다.

“앞으로 손톱 청소는 저희가 해 드릴 테니 집에서 하지 마세요, 명심하셔야 해요.”
손톱 청소는 정식으로 소독기구가 갖춰 있는 곳에서 해야 하며, 또 훈련받은 전문가의 손에 맡겨야만 의료사고가 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권사님은 “암 그래야지 전문가가 왜 필요한지 절실히 느꼈다오.”

“권사님, 앞으로는 미용실에서 관리받는 것이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긍정적 마음으로 오십시오. 권사님의 간절한 중보기도 가운데 권사님 가문의 기업이 번창하심같이 우리 미용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자국의 문화 예술이 활발히 움직이고 정치 경제가 잘 굴러가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 곳이 곧 미용실이랍니다. 미용실 영업이 잘되는 것은 국가 경제도 활기차다는 간접 메시지랍니다.”

내 얘기를 신중하게 듣던 그 권사님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그래요. 원장님의 성공적인 사업을 위해서도 기도할게요”라고 했다. 이런 내용의 칼럼을 많이 발표했으면 좋겠다는 덕담까지 해주었다. 그날 후로 수년을 서로 신앙 간증을 주고받으며 큰 며느리와 딸까지 우리 미용실의 단골이 되었다.

내가 해외 생활을 접고 돌아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가끔 생각나는 권사님.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복을 쏟아 부어주지 않으심을 그 권사님을 통해 자주 느끼곤 했다. 그분은 지금 고령자가 되셔서 바깥출입도 못 하신다고 들었다.

늘 외로움이 깃들어 있던 그 권사님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늘 간증하는 분이었다. 큰 기업을 이끌어가는 남편을 위해 중보기도를 부탁하며 꾸준히 간구하던 소망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드디어 온 가문이 믿음 위에 든든히 서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사업에 몰두한 남편은 가깝고도 먼 사이였으나 외로움과 고독한 시간으로 인해 주님께 더 많은 고백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원한 천국을 더 사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잠언 31:10)

<뭉클한 감동>

내 손에 사과 한 개
새콤달콤한 맛
앙팡진 붉은 사과
누가 곱게 물들였나
눈물겹다 봄비, 봄바람
여름 햇발 몇 날,
소낙비 장대비 몇 드럼 들어있어
이리 묵직할까
땡볕이 돌아가며
그늘진 언저리 찾아 비추고
유격 훈련병 갈바람 칼바람
날벌레 붙을까 흔들었다
신의 눈에 사랑스런 열매
뭉클한 감동으로
한 입 베어 물었다

◇김국에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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