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어른의 종류

2023. 2. 8.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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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카피라이터·사진작가)


여기 한 사람이 있다. 1944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79세.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진학도 하지 못했다. 열아홉에 우연히 신문에 난 시험공고를 보고 한약업사 자격증을 따서 스무살 가을에 함석지붕 아래 허름한 한약방을 열었다. 젊은 한약사가 지어주는 약은 값이 싸고도 효과가 확실했다. 손님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서 멀리서도 손님들이 첫차를 타고 와 줄을 섰다. 한약사는 이른 나이에 재산을 모았다.

그는 ‘이 재산을 내가 모았기에 영원한 내 재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이 사회나 국가의 재물을 잠시 위탁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사회로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은 결심으로 끝나지 않았다. 39세의 나이에 전 재산을 털어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7년 후에는 100억원대에 이르는 명망 있는 학교를 국가에 무상기증하고 학교법인 이사장 자리를 내놓았다. 학교를 설립하기 전부터 시작된 장학금 지원은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장학금을 받은 이들은 유명한 대학교수가 되고 경제학자가 되고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또 직업이 무엇이든 이 사회를 지탱하는 어엿한 일원이 됐다. 비단 학생들만 지원한 것이 아니어서 어려운 문화예술계, 여성계, 장애인단체, 환경단체 등에도 그의 보살핌이 닿았다. 친일청산을 위해, 형평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지역문화공간을 살리기 위해서도 그의 보시가 두루 미쳤다.

작년 5월 31일, 그는 60년간 일해 온 한약방을 닫았다. 이제 그는 가까운 이들과 ‘사부작 꼼지락’ 등산을 즐기며 은퇴한 노년의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지난 연말 방송 다큐를 통해 크게 알려지기 시작한 그의 이야기를 더 잘 알고 싶은 이는 그를 취재한 김주완 기자가 쓴 책 ‘줬으면 그만이지’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방영된 다큐는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

책장을 넘기며 내가 느낀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우리 사회에 이런 분이 있다니. 그것도 지역사회에서 이토록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평생 한결같이. 다큐를 기획하고 취재하고 촬영한 이들은 ‘어른 김장하’라는 제목을 붙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기부를 해서, 장학사업을 해서, 사회 환원을 해서, 그 많은 재산에도 불구하고 차도 없이 크고 화려한 집도 갖지 않고 검소하게 살아서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해온 사람, 이른 나이부터 역사의식을 갖고 공동체를 보살펴온 그 견고한 정신이 존경스러운 것이다. 자신이 지원하는 행사장에서도 무대의 중앙이 아니라 끝에 서는 그 마음 앞에 부끄러운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이 유실된 아버지의 글을 발견해 ‘원사(原士)’라는 제목으로 묶은 글이 있다. 선비에 대해 쓴 글이다. ‘무릇 선비란 아래로 농(農)·공(工)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이 된다. 지위로 말하면 농·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이다. 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는다.’ 선비라는 말을 지금 시대에 맞게 바꾸면 바로 ‘어른’일 것이다. 어른 한 사람이 선을 베풀면 그 혜택이 사회에 미치고 그 공은 다음 세대에게도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김장하 선생으로부터 수혜를 받은 많은 이들이 그가 베푼 삶을 따르며 살겠다는 진심을 갖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어쩌다 어른’이 된다. 나이와 지위와 항렬이 높다고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넘친다. 그중 어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재산을 축적하고 높은 지위를 얻는다. 사회와 공동체와 역사 앞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도 부끄러움을 모른 채 권력을 휘두른다. 언론도 정치인도 무서운 것이 있어야 한다는 선생의 말에 가슴 뜨끔해야 할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른 김장하.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선생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최현주(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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