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시간을 잘 쓰는 사람들

2023. 2. 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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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단편들』을 통해 철학과 신앙의 관계를 탐구하는 원고를 투고받았다. 책엔 키르케고르의 분신 격인 요하네스 클리마쿠스가 등장해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을 치밀하게 읽음으로써 철학과 신앙의 관계를 새롭게 논증해나간다. 판권을 확보해 미뤄뒀던 철학-종교 문제를 파고들고 싶었지만 편집자로서 준비가 너무 안 돼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단순히 텍스트 편집만이 아니라 평소 사고방식과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가를 찾아봬 경외의 마음을 보인 뒤 원고를 반려하고 싶었지만 여느 때처럼 e메일로 의사를 전했다. 이 같은 행동의 간소화는 생활에 미학이 들어설 자리를 주지 않는다.

나는 지난해 작가 J에게 e메일로 원고 청탁을 했는데, 그는 차마 메일로는 거절 못 해 전화를 걸어와 30분간 해명했다. 직장인이라 바쁠 게 분명하지만 거절 상대(출판사)에 대한 애정을 내비치면서 어떤 프로젝트 때문에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오래 설명했다. 그 프로젝트는 기후위기와 관련된 것이고 한시바삐 서둘러야 하는 일이라 수긍됐다. 무엇보다 거절의 부담을 안고 직접 전화한 것, 대화의 빗장을 완전히 지르지 않고 여지를 둔 것, 거절하는 데 반 시간이나 쓴 것이 인상적이었다.

「 소설가 김훈, 출판교정가 황치영…
없는 시간 쪼개 상대와 긴밀 대화
시간을 돈으로 세는 우리 돌아봐

우리는 시간, 열정, 에너지가 한정돼 귀히 여기는 사람과 사물에는 시간을 들이지만, 그 외의 일은 시간 빼앗긴다며 무심함과 폄하의 감정으로 대한다. “편집자들은 원고 투고자가 출판사에 직접 찾아오는 걸 꺼린다면서요?” 한 작가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 대부분 e메일로 받길 바란다.

왜일까? 첫째, 투고의 상당수는 반려되는데, 면전에서 거절할 자신이 없다. 글쓴이와 편집자는 책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를 때가 많은데, 그건 설득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둘째, 당장 해야 할 편집과 기획을 미루고 불명확한 일에 시간을 쏟기 쉽지 않다. 전적으로 근현대 노동자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교정 쪽수를 분배해두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계를 은연중 드러낼 위험이 있다. 게바우어와 불프의 말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낼 시간이 없다면 이로써 거부나 위계의 사회적 관계가 표현되는 셈”이다.

그러니 현대인의 심미성은 시간을 쓰는 방식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일본에 사는 시각예술가 향숙은 심미적인 사람이다. 그는 주변인들을 정성껏 시간 들여 대한다. 한국에 올 때 파주나 더 먼 지방까지 기꺼이 친구를 만나러 가고, 내가 교토로 여행을 가면 도쿄에서 내려와 시간을 함께 보낸다. 몇 해 전 작가 기시미 이치로가 내한했을 때는 그림 작업을 잠시 미룬 채 통역과 수행을 도왔다.

출판교정가 황치영의 시간 쓰기도 예술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현대자동차 출신에 박정희 시대를 거쳐온 그는 몸에 근면과 근대적 시간 규율이 배어 있지만, 타인에게 그런 시간 계산의 방식을 드러낸 적은 결코 없다. 그는 원고를 독파하며, 후배 편집자와 해당 작가를 위해 근거 자료들을 출력해 풀칠하고 오류를 도표화해 수기 노트로 건네주고, 젊은 편집자가 잘 모르는 한국사와 중국사 연대기를 입체적 서사로 짜 들려주는데, 이 모든 일은 직접 찾아와 얼굴을 맞대고 해준다. 이처럼 우리가 “그저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돈보다는 시간을 쓰는 데서 좋은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 시간은 상처를 주지 않고, 상대가 평가받는다는 느낌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출판계에도 방송가처럼 한 시간 단위로 자기 시간에 값을 매기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들에게 추천사를 부탁할 때는 직접 통화하기가 어렵고, 비서나 조교에게 한 건에 200만원 하는 식으로 미리 책정된 값을 전해 듣는다. 수락의 우선순위는 원고 내용보다 지불하는 액수에 있다. 편집자로서 나는 이런 방식을 이해 못 하는 편은 아니다. 몇몇 사람에게 몰리는 일의 양은 압도적이고, 의뢰되는 글들은 잘 쓰인 것이 대다수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상대를 대하는 데 1분도 허락하지 않는 신체는 차갑게 느껴지고 그 시간은 컨베이어벨트 위의 시간과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소설가 김훈은 왕성한 독서가로 인문서, 고전을 많이 읽는다. 유명한 그는 시간이 없을 게 분명한데, 그런 시간을 이질적으로 쓴다. 독자로서 응원의 말을 전하기 위해 도서전 부스에 찾아오고, 전화로 독후감을 읊는다. 때로 마치 연극적 수행처럼, 그는 갑자기 배우가 돼 편집자 한 명을 관객으로 삼고는 독후감을 육성으로 전하는데, 그때 기존의 시공간은 무너지고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 공연장에 와 있는 것만 같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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