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꼬리 수익 해법 될까···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후끈
“디폴트 옵션을 안착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올해 새로 금융투자협회를 이끌게 된 서유석 신임 협회장의 첫 일성이었다. 최근 은행, 증권, 보험 등 어느 영역 금융사를 막론하고 광고에 열을 올리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 ‘디폴트 옵션(Default Option·사전지정운용제도)’이다. 언뜻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이 영어 단어에 금융사가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가 뭘까. 디폴트 옵션은 ‘선택 사항을 고르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지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업에서 디폴트 옵션은 퇴직연금과 관련 있다. 퇴직연금은 DB(확정급여)형, DC(확정기여)형, IRP(개인형 퇴직연금) 형태로 운영된다. DB형은 가입자 의사와 무관하게 회사가 운용한다. 따라서 가입자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퇴직연금 300조원대 육박
수익률은 1~2%대 저조
DC나 IRP는 다르다. 가입자가 직접 챙겨야 한다. 그런데 많은 가입자들이 퇴직연금을 적극적으로 운용하지 않는다. 금리 인상, 주식 시장 변화 등에 따라 투자 상품을 바꿔야 하는데 사업자에 이를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다. “투자나 경제를 모른다”는 이유로 아예 건드리지 않거나, ‘귀차니즘’이 발현됐기 때문일 수 있다. 담당 퇴직연금 사업자가 신경을 쓰지 않은 측면도 없지 않다. 좀 거칠게 표현하면 퇴직연금 자산 상당 부문이 방치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융사는 이 틈을 노렸다. 이런 ‘방관’이 퇴직연금 수익률 저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간 운용사가 적극적으로 돈을 굴릴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자고 주장했던 명분이기도 했다.
2021년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은 295조6000억원이다. 2020년 말(256조원)과 비교해 1년 새 40조원이 늘었다. 2030년에는 445조원에 이를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 자본시장연구원은 노후 대비 수요가 늘어나, 2050년에는 약 2122조원으로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반면 그동안 연간 수익률은 1~2%대로 저조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등장한 제도가 디폴트 옵션이다. 지난해 7월 도입돼 12월 초부터 실제 판매가 시작됐다. 가입자가 본인의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할 금융 상품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퇴직연금 사업자가 사전에 선택한 상품으로 적립금을 자동으로 투자한다. 금융사는 고객 수익률을 높인다는 명분과 동시에 수수료 수익을 낼 수 있는 새 시장을 얻은 셈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2월 퇴직연금 사업자 2차 심의에서 94개 상품을 승인하고 4개 상품을 불승인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0월 1차 심사에서 승인된 165개 상품과 함께 총 259개 상품이 운영을 시작했다.
정부는 이번 상품 승인 과정에서 근로자의 노후 소득 보장 강화와 디폴트 옵션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전반적으로 상품 총보수를 대폭 낮추도록 했다. 디폴트 옵션 상품은 모두 ‘합성총보수(운용보수·판매보수·기타보수 등을 합한 것으로 투자자가 최종적으로 부담하는 수수료)’가 1%를 넘지 않았다.
고용부 관계자는 “근로자들이 디폴트 옵션을 활용해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할 경우 더 낮은 부담으로 좋은 상품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며 “미국, 호주 등 해외 선진국에서도 디폴트 옵션 도입 이후 상품 보수가 20~30% 인하됐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증권사가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서며 적립금도 늘어났다. 지난해 말 기준 은행·증권·보험 등 퇴직연금 사업자 43곳이 공시한 퇴직연금 적립금(근로복지공단 제외)은 331조7240억원으로 집계됐다. 2021년 말과 비교해 39조8457억원 늘어 13.7%의 성장률을 나타냈다.
시뮬레이션해보니 수익률 ‘쑥’
IRP의 경우, 가입자가 자신의 투자 성향에 따라 디폴트 옵션 상품에 가입할 수 있다. 지난해 IRP 증가세가 뚜렷했던 것도 디폴트 옵션 덕분이다. IRP 적립금은 57조6175억원으로 2021년 말보다 11조1230억원 늘었다. 증가율로 따지면 23.9%로 크게 증가했다. DC형은 올해부터 가입이 가능해진다. 기업마다 규약 반영까지 시간이 필요해서다. 기업은 퇴직연금 사업자가 제시한 디폴트 옵션을 근로자 대표 동의를 거쳐 퇴직연금 규약에 반영해야 한다. 이후 근로자는 금융기관으로부터 디폴트 옵션 상품 운용 구조나 손실 가능성 등을 포함한 정보를 제공받아 그중 1개 상품을 지정할 수 있다. 디폴트 옵션은 장기 투자에 적합한 펀드 상품과 원리금 보장 상품 등으로 구성된다. 원리금 보장 상품을 포함해 ▲타깃데이트펀드(TDF) ▲밸런스펀드(BF) ▲스테이블밸류펀드(SVF) ▲사회간접자본펀드(SOC) 등을 담았다.
최대 격전지는 TDF가 될 듯 보인다. TDF는 투자자가 정한 은퇴 시점에 맞춰 전문가가 투자 자산 비중을 알아서 조절해주는 펀드다. 2016년 670억원에 불과했던 국내 TDF 시장 규모는 현재 10조원 규모로 성장했다. 김후정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디폴트 옵션 상품 중 해외에서도 장기 투자 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TDF가 가장 주목받는다”며 “지난해 TDF 투자 수익률은 대부분 저조했지만 3년과 5년 수익률은 양호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 TDF 시장점유율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약 45%를 차지한다. 이번 디폴트 옵션 상품 적격 승인에서도 미래에셋자산운용은 1차와 2차에 걸쳐 130개 상품이 최종 승인돼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 전체 운용사 중 100개가 넘는 상품 승인을 받아낸 건 미래에셋이 유일하다. 이어 삼성자산운용과 한화자산운용이 1·2차를 합해 각각 38개, 37개의 상품을 승인받았다. 키움투자자산운용(27개), 한국투자자산운용(25개), KB자산운용(24개), NH아문디자산운용(22개), 신한자산운용(13개) 등이 뒤를 이었다. 한화자산운용은 디폴트 옵션 최종 승인에서 종합 3위, TDF 기준 2위를 기록하는 등 약진했다. 특히 한화 라이프플러스(Lifeplus) TDF는 모든 빈티지(은퇴 예상 시점)에서 승인을 얻었다. 1·2차 모두에서 전 빈티지가 승인받은 회사는 국내 운용사 중 한화자산운용이 유일하다.
디폴트 옵션을 적용하면 쥐꼬리 수익률을 높일 수 있을까. 일단 시뮬레이션 결과는 긍정적이다. 쿼터백그룹연금연구소는 최근 ‘K-디폴트 옵션 특징과 승인 포트폴리오 백테스팅’ 보고서를 내며 고용노동부가 승인한 디폴트 옵션 상품 중 14개 퇴직연금 사업자의 88개 포트폴리오 수익률을 따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퇴직연금 사업자별, 위험등급별 1~15년 동안 ‘롤링 수익률’을 검증한 결과, 15년 롤링 수익률 전체 평균은 연 6.02%였다. 원리금 보장 상품(연 5.42%) 대비 수익률이 좋았다. 세부 항목별로 보면 증권 연 6.2%, 보험 연 5.96%, 은행 연 5.88%로 증권 업종 중 가장 높은 수익률을 보였다. 디폴트 옵션을 적용했을 경우 수익률이 좋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강영선 쿼터백그룹연금연구소 리더는 “퇴직연금의 장기 투자 수익률을 올리고 위험을 관리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밸런스드 펀드와 TDF를 혼합한 합성 포트폴리오가 두각을 나타냈다”고 밝혔다. 금융당국은 오는 4월 수익률을 포함한 2023년 1분기 디폴트 옵션 운용 성과를 공시할 예정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95호 (2023.02.08~2023.02.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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