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는 없는 퀘백 이민일지 '도깨비는 없지만'

이해성 2023. 2. 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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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성 기자]

▲ <도깨비는 없지만> 아미가 출판사 POD 출판서적으로, 교보문고에 주문하여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이해성
박작가는 5년 전 이민 가방을 끌고 캐나다 땅을 밟았습니다. 남편인 '니코'와 어린아이 넷을 대동하고 한 달간 방랑을 거친 끝에 퀘벡의 한 조합 아파트에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김고은과 공유가 나오는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올드 퀘벡의 거리가 지척에 있는 곳이죠.

<도깨비는 없지만>은 가족 외의 사람과 모국어로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는 박작가가 추운 겨울의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틈틈이 쓴 에세이집입니다. 박작가는 이민 전에도 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10년 동안 산골 생활을 하며 꾸준히 글쓰기를 연마해 왔어요. 단편 소설 <산청으로 가는 길>로 한겨레 손바닥문학상을 수상한 적이 있고, 에세이집 <산골에서 혁명을>을 펴냈습니다.

공유 없는 퀘벡 이민일지 <도깨비는 없지만>을 재밌게 읽으려면, 작가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민 전의 과거가 공유되어 있지 않아서, <산골에서 혁명을>을 먼저 읽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산청으로 가는 길>도 읽으면 더 좋고요.

박작가의 인생스토리는 제1막 산청으로 가는 길, 제2막 산골에서 혁명을, 제3막 도깨비는 없지만 요렇게 이어지거든요. 갑자기 3막부터 보면,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오를 수 있어요. 남편으로 언급되는 '니코'라는 인간은 대체 정체가 뭔가, 어쩌다가 애가 4명이나 되었는가, 이민 전에는 뭐 하고 살았는가 등.

캐나다의 서민 아파트에 자리 잡은 고학력 이주여성의 녹록치 않은 일상을 그려낸 에세이집을 읽는데 이런 배경 지식이 꼭 필요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구글 맵에 접속해 올드 퀘벡과 근처의 서민 거주 지역 Basse-ville(아랫동네)을 한 시간 정도 가상으로 거닌 후에 <도깨비는 없지만>을 읽으면 더욱 입체적인 북구 인문학 여행이 됩니다.

퀘벡은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불어를 공용어로 쓰는데, 몇백 년 전 유럽인 이주의 초창기에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영국의 식민지가 된 케이스입니다. 사회, 문화, 정치, 언어, 역사적으로 독특한 입장에 있죠. 아메리카 원주민 문제까지 생각하면 더 복잡합니다. 그런 복잡한 맥락의 장소에 그것과는 또 다른 사회, 문화적 맥락을 가진 이민자가 와서 산다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이 절로 떠오를 거 같아요.

11, 12장 '나는 기억한다'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북미의 도로를 누비는 자동차 번호판에는 주를 상징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대요. '아름다운 브리티시 콜롬비아' '야생장미의 나라' '당신이 발견할 것' 등. 퀘벡 주의 번호판에는 '나는 기억한다 Je me souviens'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북미의 번호판 중 유일한 불어죠. 이는 퀘벡 주 국회의사당 정문의 현판 머리돌에 새겨진 문구라고 합니다. 역사를,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잊지 말자는 거겠죠. 박작가의 문장을 옮겨 보자면,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자의 음산한 귀기마저 느껴졌다.' 역사의 무거운 스트레스가 팍팍 느껴집니다.

박작가 가족은 밀린 양육수당을 탄 기념으로 가까운 보스턴 여행을 갑니다. 퀘벡에서 직선 거리로 630km만 남하하면 미국의 보스턴이 나옵니다. 보스턴에는 대형 한인 마트와 파리바게뜨가 있고, 날씨도 한국처럼 온화합니다.

보스턴이 자리한 메사추세츠주 차량 번호판에는 <아메리카의 정신 Sprit of America>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기억한다>가 새겨진 박작가네 자동차는 하버드대 주변에서 <아메리카의 정신> 사이를 헤매고 다닙니다.
 
수많은 <아메리카의 정신>들이 회전 신호도 기다리지 않고 우리를 앞질러 능숙하게 지나갔다. 어떤 차는 우리에게 경적을 내지르기도 했다. 니코라는 캐나다 촌놈은 진땀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우리 옆 차선으로 바짝 다가온 붉은 포드의 운전석 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포드는 우리를 향해, 이 도로는 비보호라고 고함쳤다. 잠시 내려졌던 차창이 서서히 올라가는 사이, 그는 시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짧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굿 럭."

이윽고 그 붉은 포드에 담긴 <아메리카의 정신> 또한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우리를 추월했다. 하버드 에비뉴를 주행하는 차는 뒤모습조차 시건방지게 자신만만한 느낌. 이것이 바로 아메리카의 정신일까? 순간 든 어쭙잖은 통찰이었다.
 
아메리카의 정신은 미국의 건국 정신인 개인의 자유를 의미하는데, 이 사건에서는 해방감보다는 시건방지고 기분 나쁜 이미지를 던져줍니다. 한때 젊고 찬란했던 사상도 시간이 지나면 쓸쓸하거나 씁쓸해져 버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꼰대의 에헴 하는 기침소리가 되는 게 운명이죠. 여기선 독립과 자유를 외치는 아메리카의 정신이 감수성 넘치는 프랑스 문화를 기죽이는 야만이 되는군요.
 
▲ <도깨비는 없지만> '수표'라는 꼭지 중 우편배달부 취업에 실패한 니코 이야기
ⓒ 이해성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박작가와 함께 사는 '니코'는 프랑스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 선생(1712-1778)과 성씨가 같아요. 족보와는 관계없지만 자칭 아나키스트이고요. 그의 어머니 '마농'이 물려준 가구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허영심이 잔뜩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원목 식탁과 식기장이 아랫동네의 반지하 아파트로 내려와 짜파게티와 팔도비빔면을 보관하는 찬장으로 전락하는 장면은 영화 <기생충>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랑을 찾아 한국에 온 니코는 의류수거함에서 주운 듯한 낡은 코트에 레게머리를 하고 다니며, 서울의 거리를 누비는 시내버스 안에서 간장과 참기름에 비빈 식은 밥을 먹던 인물이었죠. 이런 국제 히피들은 대개 전형적 부르주아 가정의 '탕아'들로, 학력과 정치적 인식은 높지만 생활력 레벨은 미지수지요.

니코가 한국의 산골에서 탈자본주의 혁명을 하는 동안 네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 어려움을 절감했던 박작가. 거북이섬으로 돌아가 아나키의 동지를 찾겠노라는 니코를 따라 캐나다 땅에 발을 디뎠는데, 동지는 찾아보기 어렵고,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세계적 사건에 발이 묶인 상황에서 문학에의 열정으로 마음을 위로했나 봅니다. 그래도 산골에 살 때보다는 집도 넓어지고, 아이들도 나름 잘 크고 있으니 성공한 거 아닐까요?

퀘벡 출신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의 미학세계가 더 이상 느끼하게 느껴지지 않고, 자막 없이 프랑스어 영화를 본다는 말로 문화적 적응에 성공했음을 자축한 후, 박작가는 책의 말미에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사를 갑니다. 영영 지하에서 못 올라오게 된 <기생충>의 송강호와는 다르지요.

<도깨비는 없지만>은 전자책 기반으로 POD(publish on demand) 형태로 출간되었습니다. 교보문고에 주문하면 인쇄된 책자를 받아볼 수 있어요.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원주민 기숙학교의 메아리'라는 꼭지인데,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를 말살하기 위한 기숙학교가 캐나다에서 1996년까지 운영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021년 5월,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과거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215구의 어린이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한다는 캐나다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최근까지 있었다니, 개탄할 일입니다. '선진국'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를 일컫는 다른 이름일 뿐인가 싶고요. <도깨비는 없지만>은 선진국의 환상을 깨는 대목이 많아서, 읽다 보면 드라마 <도깨비>의 로맨티시즘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풍에 물든 올드 퀘벡의 낭만적인 풍경과 일상 속의 에피파니가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질 듯 말 듯 은근슬쩍 겹치기도 해요. 언뜻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꼭지들을 이민 적응 흐름에 맞게 편집한 것도 박작가의 센스. 과연 박작가는 문학계의 언더그라운드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영원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자기 정체성이라는 고향을 향한 여정에 있는 박작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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