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⑱] 번사창이 수리 공방이 된 이유

데스크 2023. 2. 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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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외세에 흔들림 없는 국가를 세우고 이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흔들림 없는 국가를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부국강병’이었다. 강한 군대를 건설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건물을 떠받치는 주요 기둥 중의 하나였다. 이런 이유로 세운 것이 번사창(현재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 내)이다.


기기국 번사창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적극적으로 화승총을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화승총은 조선군의 주력 무기로 자리 잡았다. 사냥꾼 중에는 화승총을 수단으로 삼은 포수가 등장하였다. 봉오동,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한 홍범도 역시 포수였고, 홍범도가 의병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바로 일제가 화승총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말 화승총은 군대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조선군의 화승총 (출처 <조선전쟁 생중계>(2011), 김원철 그림)

조선 사회에 화승총이 널리 퍼졌다는 것은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특히 총기는 탄약과 탄환 등의 보급이 매우 중요한데, 이 역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어떤 이들은 초석, 유황, 목탄 등 재료를 마련하여 화약을 직접 제조하고, 납 등을 녹여 탄환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하지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을 거치면서 화승총만으로는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번사창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만들어졌다. 당시 조선은 청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고, 청은 조선을 통해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른바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이었다. 그 결과 수년간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결국 1881년 김윤식이 인솔하여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이때 이들의 주요 목적은 신식 무기의 생산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다.


조선 정부의 목표는 서울에 신식 무기 생산 공장을 세우고, 여기서 3만 명에 달하는 한양 수비 병력을 무장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사업을 추진하면서 청의 비협조와 조선 정부의 재정 문제에 직면하였다. 결국 목표를 수정하여 총기를 수리하는 수준으로 시설의 규모를 축소하였다. 그 결과 세워진 것이 중국식 벽돌 공장인 번사창이다.


머스킷 (출처 Wapenhandelinghe van Roers Musquetten ende Spiessen(1608), 위키디피아)

번사창을 비롯하여 당시 조선군의 상황을 살펴보면 여전히 화승총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무장이 전쟁터에서 기대하는 성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덕분에 종종 화승총의 성능을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신식 소총과 화승총의 성능을 비교한다면 아마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이와 관련한 성능 비교를 심지어 직접 실험까지 수행한 연구가 최근에 많이 나왔다.


연구 결과를 살펴보면 동일한 화약을 사용한다면 화승총의 성능 역시 무시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연구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있는 무기박물관(Landeszeughaus, Styrian Armoury)에서 수행한 실험이다. 해당 박물관은 18세기 이전까지 무기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 수행한 실험은 실제 해당 시기의 무기를 테스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실험의 제한요소를 살펴보면 시대별 무기의 성능을 살펴보기 위해 다른 요소 이를테면 화약, 사수의 숙련도 등을 고정값으로 처리하였다. 소총의 성능 중에 화력 특히 관통력만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흔히 가속도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뉴턴의 운동 제2법칙 ‘운동하는 물체의 가속도(a)는 작용하는 힘(F)의 크기에 비례하고 질량(m)에 반비례한다.’(이를 수식으로 표현하면 F=ma)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라츠 무기 박물관의 연구는 이 중에서도 가속도(a)를 확인하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실험을 벤자민 로빈스(Benjamin Robins, 1707-1751)라는 사람이 이미 1740년대 했고, 그 결과는 1742년 New Principles of Gunnery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제목이 왠지 익숙한 것은 뉴턴이 1687년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는 제목으로 '사과는 떨어진다'는 비유로 유명한 뉴턴의 운동법칙과 만유인력 등을 발표한 책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벤자민 로빈스의 탄도진자 (출처 Benjamin Robins, New Principles of Gunnery (1742))

벤자민 로빈스는 전쟁에서 화기의 성능이 형편없는 것을 보고 관련 연구를 진행하였다. Landeszeughaus의 연구와 차이가 있다면 로빈스는 그 당시 전쟁터에서 실제 사용하는 무기를 가지고 실험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로빈스가 어떻게 관통력을 측정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든다. 명중률 같은 경우에는 탄착군(탄환이 표적에 맞은 자국)을 보고 확인할 수 있지만, 속도(정확히는 총구를 나오는 순간의 속도)를 측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로빈스는 이때 탄도진자(Robins ballistic pendulum)를 고안하여 측정하였다. 화기학에서 중요한 발명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로빈스는 탄도진자를 통해 탄환이 총구에서 나오는 순간의 에너지를 측정하였다. 탄환의 총구 속도는 약 1,641ft/s이었다. 여기에 탄환의 무게를 추가해 총구에서 탄환의 운동에너지 즉, 관통력을 계산하면 14세기 초에 사용한 스페인식 머스킷의 경우 6,980J이다. 반면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군용 소총의 경우 1,764J에 불과하다. 이런 결과 때문에 일부에서는 머스킷의 화력이 더 좋다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사용한 화약량과 탄자의 무게 등을 고려하면 스페인식 머스킷의 성능이 현대 소총에 비해 형편없다는 점이다. 스페인식 머스킷이 더 큰 탄환을 사용하고, 더 많은 화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힘 역시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약 4배의 힘을 더 내기 위해서 화약은 50배를 더 사용하였고, 탄자의 무게는 6배 이상 무거운 것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전차 포탄으로 밀도가 높은 열화우라늄이나 텅스텐 등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7세기 머스킷 매뉴얼 (출처 : 위키)

여기에 추가할 내용이 하나 더 있다. 그리츠 무기 박물관의 실험은 동일한 흑색화약으로 실험하였다. 하지만 흑색화약은 시기별, 지역별로 제조 방법이 다르고, 이에 따라 폭발력 역시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14세기 초 제조법에 따른 폭발력이 더 높았고, 오히려 이후 절반 가까이 폭발력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난다. 머스킷의 내구성이 폭발력을 감당하지 못해 자칫 사수가 죽거나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병을 양성한다는 것은 단지 최신 무기만을 들고 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부터 생산과 유지 관리까지 포함하였다. 이러한 양성 과정은 천문학적인 비용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비용보다 다른 비용이 더 중요하였다. 결국 이러한 우선 순위는 고종을 비롯한 당시 정책 결정을 담당한 이들이 결정하였다. 그 결과는 임오군란이었고, 이후 이름뿐인 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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