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경복궁의 25% 밖에 못 보고 있습니다 [중앙선 역사문화기행]
[최서우 기자]
한성 백제 시대가 끝난 후, 서울이 수도의 위상을 찾기까지 무려 9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신라시대 한양군과 고려시대 개경에 버금가는 '남경(南京)'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조선왕조로 바뀌면서 태조 3년(1394)년 이성계가 이곳으로 천도하며 수도의 위상을 찾아온다.
한강을 서쪽으로 삼은 풍납토성과 남한산에서 뻗어온 44.8m 구릉의 몽촌토성과 달리 조선의 궁성인 경복궁은 북악산을 병풍 삼고, 아래로는 청계천과 한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표본 위에 지어졌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조선총독부에 가려지는 수난사를 겪다가 요즘에는 다시금 탁 트여 옛 서울의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큰 시련을 딛고 도약하는 느낌이다.
오늘날에도 서울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경복궁으로 가보자.
왕의 영역
경복궁을 대중교통으로 오려면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된다. 4번 출구로 빠져 나와 광화문을 보고 가는 법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바로 통하는 5번 출구로 가는 법이 있다. 타 지역에서 올 때 체력이 좋다면 서울역에서 숭례문-덕수궁-광화문 광장을 거쳐서 들어와도 된다.
나는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과 세종대왕의 동상을 마주한 다음 경복궁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광화문 광장 오른편으로는 교보빌딩, KT광화문지사, 주한미국 대사관, 왼편으로는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서울청사 별관이 눈에 띈다. 광장 좌우로는 원래 조선시대 행정각부에 해당하는 육조가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별관의 행정 각 부가 육조의 역할을 일부 이어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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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223호 근정전과 품계석.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태조 4년(1395) 판삼사사 정도전은 왕이 부지런해야 함을 강조하며, '근정전(勤政殿)'이라고 이름지었다. 1,2층 지붕 양쪽 끝부분을 보면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잡상(雜像)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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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외관은 2층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천정까지 공간이 시원하게 트여 있다. 외관 지붕을 보면 1, 2층 지붕 좌우로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보이는데, 이를 잡상이라고 한다. 근정전 외 궁내 다른 건물 지붕에도 배치되어 있는데, 액운을 막기 위해 배치한 걸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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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정전 내부의 어좌. 어좌 뒤로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다. 조선 왕이 거처하는 곳에항상 있는 그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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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뒤에는 왕이 집무를 봤던 보물 제1759호 사정전이 있다.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어좌와 일월오봉도가 있다. 그리고 용과 구름이 얽혀 있는 붉은빛 그림 운룡도가 보이는데, 용인 임금과 구름인 신하가 잘 어우러져 좋은 정치를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경복궁 창건에 관여한 정도전이 말한 대로 항상 생각하며 나라의 이치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는 곳인데, 왕조 역사를 보면 항상 그렇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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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759호 사정전(思政殿). 정도전은 서경 주서 홍범 편의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思曰睿, 睿作聖).'는 문구를 인용하며 깊이 생각하는 군주상을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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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정전 내부. 어좌와 일월오봉도 위로 붉은빛 그림 운룡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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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전 뒤로는 왕의 침소인 강녕전이 있다. 낮에 부지런함과 생각을 갖춰야 하는 왕은 밤에는 홀로 공부해서 덕을 쌓아야 한다. 강녕전 외관을 보면 특이한 게 있는데, 용마루가 없다. 누군가는 왕이 유일한 용이어서 없다고 하지만, 확실한 건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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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침소였던 강녕전.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정도전은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이라는 서경의 문구를 인용하여 이름 지었는데, 홀로 있을 때 덕을 쌓아야 함을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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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여성들의 영역
강녕전 뒤로는 왕실 여성들의 영역이 시작하는 교태전이 있다. 보통 왕비의 침전으로 알고 있는데, 창건 당시에는 없었다가 세종 25년(1443)에 증축된 건물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왕이 이곳에서 좌승지를 불러 논의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당시에는 국정을 논의하는 기관으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왕비 침전으로 기능한 건 생각보다 상당히 늦은 대원군 중건 이후다.
'교태(交泰)'의 의미는 주역의 11괘인 '태괴(泰卦)'인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했는데, 하늘과 땅이 교통한다는 의미다. 조선 초기에는 오히려 사정전 운룡도의 의미와 가깝다. 그러다가 왕비의 침전이 되면서 왕과 왕비의 조화와 이에 따른 왕실의 안녕을 말하는 것으로 전해진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다 강녕전과 교태전 측면 양 끝에 새겨진 '희(囍)'자를 보면 착각할 만하다. 교태전도 강녕전과 마찬가지의 운명을 겪다가 같은 1994년에 함께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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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조선 초기에는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이었다. 지붕 좌우에 새겨진 '囍'가 눈에 띈다. 경복궁 중앙은 가장 앞에 있는 근정전부터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까지 일렬로 놓인 구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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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태전 뒤 후원인 아미산 굴뚝을 보는 것도 잊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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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 북동에는 고종의 양어머니이자 순조의 며느리인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이 있다. 침전 뒤쪽에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당초문과 박쥐문을 정교하게 넣은 담장형 굴뚝이 눈에 띈다. 담장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 특이한 선 문양의 황토색 담 사이로 운치 있는 식물들이 새겨져 있다. 자세히 보면 선 문양으로 한자를 쓴 것이다. 담장들의 글자를 종합하면 '낙강만년장춘(樂彊萬年張春)'인데, 뭔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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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 일원. 독특한 누각인 청연루가 눈에 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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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810호 자경전 십장생굴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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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경전 꽃담길. 최근 일제강점기 당시 사진과 비교했을 때 엉터리로 복원되었다고 뉴스에 보도되었는데, 언제 복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돌담을 보면 세밀하게 새긴 선형이 보이는데, 신정왕후의 장수를 기원한 한자 문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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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 건청궁 영역과 경회루
자경전 아래로는 왕실의 부엌 역할을 한 내소주방과 외소주방 그리고 왕세자와 세자빈의 거치인 자선당과 비현각이 있다. 소주방도 1915년에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이곳에 개최하면서 철거되는 수모를 겪다가 재건 되기까지 1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봄과 가을이 되면 이곳에서 궁중병과와 약차를 체험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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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복원된 자선당.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 사정전 정동쪽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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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경전 서쪽 돌담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최근에 복원되어 아직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흥복전과 고종이 나랏일을 의논했던 당시 모습이 남은 함화당과 신하들과 경서를 읽은 집경당이 있다. 그 뒤로 후원이 하나가 보이는데, 연못 가운데 섬 위에 육각형의 정자와 다리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과 함께 위용을 뽐낸다. 향원정과 취향교다. 2015년에는 향원정 남쪽에서 조선 최초 전기 발전소 터를 발견했는데, 향원정 일대는 어찌 보면 한국 전기 역사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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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후원인 향원정과 취향교. 향원정 남쪽에는 전기발전소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전기 역사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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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건청궁(乾淸宮) 곤녕합(坤寧閤). '건청'과 '곤녕'은 도덕경 제39장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평안하다(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에서 인용한 것이다. 하지만 황후의 마지막은 그렇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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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 북서에는 중국풍이 많이 섞여 있고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신 태원전이 있다. 태원전에서 다시금 광화문 쪽으로 내려가면 옛 만 원 화폐의 뒷면의 주인공인 경회루가 보인다. 경복궁의 대표 연회장답게 연못 가운데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가장 큰 단일 목조건물이기도 하다. 태종이 완공한 초기 경회루는 이보다 더 더 화려했다고 하는데, 지붕이 이층 구조였다고 한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한 후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의 사상을 형상화한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북악산을 병풍삼아 지었던 궁궐은 조선왕조의 역사를 그대로 따라갔다. 임진왜란 때 불타 270년 동안 방치되어 범들과 짐승들의 소굴로 전락했던 안타까운 역사를 겪다가, 흥선대원군 때 왕실 권위회복으로 중건되더니 얼마 못 가 일제에게 국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국권이 넘어간 후 다수 전각들이 헐리거나 팔려서 호텔 별관이나 별장으로 전락한 안타까운 역사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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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 아래 경회루의 모습. 다시금 시련을 이겨낸 경복궁이 연못 위 물안개처럼 태평하길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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