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일잘러'가 말하는 그렇게 모두 시니어가 된다

이마루 2023. 2. 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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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에서 시니어로 제대로 점프하고 싶을 때?

그렇게 모두 시니어가 된다

‘저 빌런들은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입사 3~4년 차가 됐을 때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저 사람도 나름 똑똑해서 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것이고 ‘나는 일 안 하는 사람이 돼야지!’라거나 ‘멍청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대체 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며 사는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3년, 7월이 되면 나는 8년을 꽉 채운 연차가 된다. 늘 필요 이상의 저자세로 모두에게 배우려고 했던 내가 ‘주니어’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한 연차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토록 이해하고 싶었던 회사의 빌런들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저연차이던 시절 실장님들이 버릇처럼 내뱉던 “너도 늙으면 알게 될 거야”라는 지루한 문장 아래 ‘퉁’쳐진 많은 것 또한 그즈음에 깨닫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뭘까? ‘시니어’에 가까워지면서 나름대로 내린 답은 다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결정하기로 결정하는 것. 시니어의 문턱에 서니까 이전보다 결정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그간 나는 결정을 내릴 일이 거의 없었다. 혼자서 열심히 하면 되는 일이 많았다. 혹은 실패하더라도 그 범위가 너무 작아서 결정하는 줄도 모르고 지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프로젝트가 망하면 피해 범위가 제법 크다. 결정 같은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꾸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이러면 되겠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물으면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너야”라는 답만 돌아왔다. 외로웠다. 지금까지 우유부단하거나 누가 봐도 잘못된 결정을 하는 시니어를 보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정답이라는 게 없는 일은 사람을 두렵게 하고, 먼 거리에서 보이는 것이 안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결정을 내릴 기준도 모호하다. 지금까지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기준이 명확했다. 클라우드 회사에서 일할 때 나는 고객에게 가장 적은 비용, 가장 최선의 성능을 보장할 수 있는 선택지를 만들어서 보여주었고, 그들의 의사결정을 성실히 도왔다. 그런데 이제는 비용과 성능 중에서도 무엇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러려면 우리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우리 조직의 비전은 뭔지, 나는 어떤 우선순위를 가진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 모호함 속에서 결정하기로 결정하는 것. 시니어의 일과 본질이었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활용해서 큰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것. 수석 프로덕트 매니저(PM)와 일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 PM이 내게 기술적인 디테일부터 프로젝트의 비용과 일정, 목표, 그 다음 프로젝트에 대한 것까지 꽤 관점의 폭이 넓다며 칭찬한 기억이 났다. 내가 중간 연차 역할을 모두 해야 하는 과도기에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일 잘하는 주니어의 요건으로 ‘빵꾸’ 내지 않는 것을 꼽는다. 내가 맡은 부분은 작더라도 장인 정신을 갖고 완벽하게 해내고, 내가 하는 일이 전체 그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정확하게 알고 그 다음을 대비하는 것, 그런 주니어는 ‘일 잘한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이 부족해서 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할 수 없는 때가 반드시 온다. 수석 PM과 함께 일하며 밀고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어떤 때는 나에게 밑도 끝도 없는 자율을 주었지만, 어떤 때는 개입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 되짚어보니 패턴이 있었다. 파트너와 함께하는 정기 미팅에 특별한 안건이 없으면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 그 시간에 오히려 파트너에 대해 공부해서 그 다음 시간에 여러 가지 통계나 인사이트를 가져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자신의 레벨에서 볼 수 있는 정보를 활용해 다른 팀을 설득하는 것은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참석한 모든 곳에서 나를 칭찬해 줬고, 자신이 가진 네트워크와 자료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시니어는 자신의 팀원이 무엇을 잘하는지 파악하고, 어떻게 장기판 위에 말을 놓을지 생각한 뒤에 일을 시작한다는 것을 배웠다. 에너지를 아끼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고, 그러면 자리에 걸맞은 통찰력이 줄어든다.

한 해씩 나이 먹음을 느끼는 순간들이 슬프지만은 않다. 인생에도 나이 듦이 주는 아름다움이 있듯 회사도 마찬가지다. 결국 내가 조금 더 재미있는 일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니까. 계단이 있을 때 그 턱 아래에 있는 사람은 대체 저기를 어떻게 가나 싶고, 그 턱 위에 있는 사람은 왜 안 올라오고 그냥 있냐며 채근하기 쉽다.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그 턱을 슬로 모션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 희한한 시기를 꼼꼼히 기록하면서.

염지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미국 아마존 신규 사업부에서 일하는 문과생. 그 경험을 담아 〈IT 회사로 간 문과 여자〉를 펴냈다. 주로 ‘회사원’이지만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더 오래, 더 멀리 나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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