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산 로드에서 만날 기둥들, 미리 설명 드립니다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설 연휴를 앞두고 저는 태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캄보디아를 입국할 때에는 입국심사관조차 보지 않고 입국을 했는데, 막상 출국할 때에는 열 손가락의 지문을 전부 찍었습니다. 그래도 캄보디어와 태국 사이의 국경에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만큼 오래 지연되지는 않았습니다.
국경을 넘는 버스에는 캄보디아인도 태국인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고사하고 아시아인도 저 하나밖에는 없는, 서양인 여행자들만이 가득 찬 버스였습니다. 태국에 들어와서 다시 네 시간을 넘게 달려 방콕, 카오산 로드에 도착했습니다.
카오산 로드에 내려 호텔로 가는 짧은 길에도 눈에 띄었던 것은, 주변에 여러 기념탑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길 한쪽에는 거대한 민주기념탑이 있었고, 그 인근에 10월 14일 기념탑도 있습니다. 태국인들보다 서양인이 많을 것 같은 여행자들의 거리에, 태국 근대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 카오산로드 인근의 랏차담넌 거리. |
ⓒ Widerstand |
태국이라는 근대국가의 탄생부터가 그랬습니다. 많이들 아시다시피 태국은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에 진출하는 와중에도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근대화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었죠. 하지만 태국 내에는 여전히 불만의 목소리가 많았고, 근대적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사회 변혁의 분위기가 태동합니다.
결국 1932년, 인민당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벌어졌죠. 인민당은 파리에 유학하고 있던 태국인 유학생들이 만든 조직이었습니다. 프리니 파놈용을 비롯한 일반 학생들과, 플랙 피분송크람을 비롯한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되었죠.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태국으로 돌아와 군의 고위 장교들까지 포섭하는 데 성공했고, 결국 쿠데타에 성공한 것입니다.
▲ 민주기념탑 |
ⓒ Widerstand |
파시즘에 경도되어 가던 피분송크람은 1941년 일본과 비밀리에 군사동맹을 체결했고, 일본은 태국을 영국령 버마 침략의 발판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듬해에는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까지 감행했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반발의 목소리는 있었습니다. 프리디 파놈용도 반정부 운동에 함께했고, 주미대사였던 세니 프라못을 중심으로 '자유 태국 운동'이라는 조직이 창설되어 미국의 도움까지 받았습니다. 결국 1944년, 패전 직전 피분송크람은 의회에 의해 총리직을 상실합니다.
10월 14일 기념비
1945년 2차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았습니다. 이듬해 태국은 민주적인 선거를 치렀고, 프리디 파놈용이 이끄는 인민당이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했습니다. 그러나 프리디의 집권 기간은 6개월을 채 가지 못했고, 곧 쿠데타가 벌어지며 군정이 수립됩니다. 군부는 피분송크람을 다시 데려와 총리로 삼았습니다.
▲ 10월 14일 기념탑. |
ⓒ Widerstand |
오히려 1957년,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를 통해 해군 제독 출신 사릿 탄나랏이 총리직에 오릅니다. 1963년 사릿이 사망하자 이번에는 육군 장군 출신 타놈 킷티카촌이 정권을 잡았죠. 베트남전이 벌어지며 태국은 더욱 충실한 미국의 우방국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의회가 해산되고 헌법이 정지되는 등 독재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졌습니다.
결국 정권에 대한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1973년 6월 학생신문에서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대학생 9명이 퇴학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10월까지 시위는 점차 거세졌습니다. 민정 이양을 주장하던 50만 명의 시민들을 향해 군부는 헬기 사격까지 벌이기 시작합니다.
군부의 강력한 진압에 대피하기 시작한 시민들에게 국왕은 왕궁의 문을 열어주었고, 국왕은 정권의 퇴진을 명령합니다. 이렇게 민정 이양이 시작되었고, 카오산 로드 인근의 10월 14일 기념비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사건은 1932년 쿠데타 이후 국왕이 정치에 개입한 최초의 사례였고, 이렇게 세워진 민주정에게 좋은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 탐마삿 대학 내의 민주화운동 관련 조형물. |
ⓒ Widerstand |
특히 당시 수친다 총리가 무릎을 꿇고 국왕을 알현하던 모습은 태국 국왕의 정치적 권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힙니다. 그렇게 민주정은 다시 수립된 셈이었지만, 결국 국왕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점차 커져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7년 개헌을 통해 소위 '인민헌법'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만들어진 이 헌법은, 태국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상하원 모두를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하는 의회가 테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탁신 친나왓이 2001년 총리직에 올랐습니다.
탁신 친나왓은 2005년 선거에서도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지만, 탁신의 정책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2006년 쿠데타가 벌어지며 군이 정부를 장악했고, 1997년 제정된 인민헌법의 효력이 중단됩니다. 하원은 선거를 통하지 않는 임명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이후 태국의 정치는 탁신을 지지하는 레드 셔츠와 탁신을 반대하는 옐로우 셔츠로 나뉘었죠. 탁신 지지파는 몇 차례 정당을 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기도 했지만, 헌법재판소의 정치활동 금지 판결로 해산되곤 했습니다.
2011년에는 탁신 친나왓의 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총리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쿠데타의 발생으로 민주정이 붕괴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쿠데타로 집권한 프라윳 찬오차 총리가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죠.
▲ 락 무앙 |
ⓒ Widerstand |
생각해보면 라마 1세가 왕위에 오르고 방콕을 세운 것도, 톤부리 왕조의 국왕이었던 탁신을 향한 쿠데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역사에는 수 없는 투쟁과 정변이 있었습니다.
그 투쟁과 정변은 민중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잠시 스쳐가는 여행객인 제가 함부로 판단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락 무앙에서 모시고 있는 기둥보다 훨씬 더 높게 세워진 민주기념탑을 바라보면서, 그 투쟁의 역사 속에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생각합니다. 지금의 방콕은, 그 사람들이 꾸었던 꿈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은 도시일까요.
민주기념탑 앞의 대로에는 왕실 구성원들의 사진이 화려한 장식과 함께 걸려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이 거리의 밤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우리가 이 거리의 풍경을 썩 슬퍼하지 않고, 조금 더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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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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