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이 노래가 준 위로 [음악방송 작가의 선곡표, 문득 이 노래]

김혜원 입력 2023. 2. 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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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의 '오르막길'

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 <편집자말>

[김혜원 기자]

새해를 시작한 지 벌써 한 달 하고도 며칠을 훌쩍 넘겼지만, 내 마음속 새해는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비록 농사를 짓는 사람은 아니나, 왠지 설과 입춘을 지나 정월 대보름달을 보며 새해의 소망과 다짐을 마음판에 새겨 넣어야 한 해가 비로소 시작되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누가 들으면 "혹시 농경시대에서 오셨어요?"라고 설익은 농을 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오래된 마음의 결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제야 비로소 '2023년의 기운'이 사방을 온전히 에워싸는 느낌이 든다. 요즘엔 다소 희미해진 풍경이긴 하지만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쓰곤 하던 '입춘대길' '건양다경'같은 입춘첩을,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곱씹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새로운 해의 다짐을 해 보려 한다.

'이모저모' 애썼던 한해
 
 정인 '오르막길이' 담긴 앨범.
ⓒ Dreamus
 
개인적으로 지난해는 무척이나 바쁘게 살았던 거 같다. 그 이전 해에 기획했던 '책'을 쉼 없이 써야 했고, 틈틈이 온라인 신문에 '연재'도 꾸준히 했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을 더욱 사랑하자'는 한 해의 모토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이모저모 애를 썼었다. 그 여파로 연말에는 체력과 심력이 다 소진된 듯해서 조금 괴롭기도 했지만 뭐 괜찮다. 그동안의 열심히 각기 다른 꽃망울을 맺는 걸 지켜보는 뿌듯함 덕분인지 회복의 속도도 그만큼 빨랐으니까.

그렇게 잠시 널브러져 있던 어느 날 저녁이었던가 보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내려온 아이가 침대 위에서 아주 익숙한 리듬을 콧노래로 흥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계시를 받아 든 사람처럼 경건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마치 잊었던 것을 알려주고야 말겠다는 알람처럼 말이다.

막 잠들기 전 독서로 하루를 마무리할 시점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아이가 여러 번 반복하던 그 노래,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라는 첫 마디의 서늘한 가사는, 언제나처럼 즉각적으로 폐부를 찌르며 다가왔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삶의 지평선' 그 어디쯤에 이정표로 꽂아둔, 그래서 의지가 꺾이려고 할 때, 혹은 결연한 의지를 만천하에 표명하고 싶을 때. 꺼내 듣거나 부르곤 하던 노래, 정인의 '오르막길'이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가파른 이 길을 좀 봐
그래 오르기 전에
미소를 기억해 두자
오랫동안 못 볼 지 몰라
완만했던 우리가 지나온 길엔
달콤한 사랑의 향기
이제 끈적이는 땀
거칠게 내쉬는 숨이
우리 유일한 대화일지 몰라
한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오른다면
한 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난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여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크게 소리쳐 사랑해요 저 끝까지/ 정인 '오르막길' 가사

정인의 비교할 데 없는 음색과 직설적이고도 덤덤한 가사가 일말의 과정을 배제한 채 들려온다. 그러기에 심장에 바로 딱, 꽂히는 노래다. 이 노래가 월간 윤종신 '2012년 6월호'에 수록돼 세상에 나왔을 무렵, 어쩌면 나는 생애 가장 길고 험했던 길을 절뚝이며 지나는 중이었다. 

그동안의 길이 아무리 험했다고 한들, 이보다 어렵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그 당시 내 정신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바로 그해 6월에 사랑하는 엄마가 천국으로 떠나셨고, 나를 지지하던 큰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는 상실감에 시간의 흐름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갑자기 이별이 우리 앞에 놓일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황망함과 아쉬움, 그리고 왠지 모르겠으나 서러움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북받쳐왔다. 장례를 치르고도 아주 한참 동안 혼자 서재방에 앉아 행여 누구에게 들킬 새라 숨죽여 꺽, 꺽 울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막 발표돼 세간의 화제가 됐던 이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아주 천천히 한 줄, 한 줄 보약을 마시듯 곱씹곤 했었다. 가사는 누구에게나 인생은 '숨이 턱, 턱 차오를 정도의 가파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니 지금이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할 필요도 없으며 오르다 힘들면 잠시 쉬면서 올라온 아름다운 길을 쳐다보라 속삭여주기도 했다. 그랬었다, 이 험한 길을 걷는 것이 '그대' 혼자만은 아니라는 공감과 위안이 이 노래 속에는 녹아 있었던 것이다.

노래가 준 위로
 
 새해를 시작한 지 벌써 한 달 하고도 며칠을 훌쩍 넘겼지만, 내 마음속 새해는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다.
ⓒ pixabay
 
노래는 머리로 느끼는 것이 아닌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스며드는 것이기에 심장에 바로 꽂히는 가사엔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 아니 혹여 그렇지 않더라도 어느 날 이처럼 노래  한 자락에 마음을 내어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장을 출렁이게 만든 그 물기를 나처럼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후로 아주 오랫동안 노래 오르막길의 가사는 강이 되어 내 몸을 흐르고 흘렀다. 노래의 위로는 이렇게 원래 가지고 있던 작자의 의도보다 증폭될 때가 훨씬 많다. 이 '오르막길'의 지향점이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한 내러티브였든,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 대한 지침이었든, 10여 년 전 사랑하는 엄마를 떠나보낸 딸이었던 내게는 아직 채 가닿지 못한 저 머나먼 삶의 지평선을 향해 나 있는 이정표였고, 안내자였으며, 때론 쓸쓸한 발걸음에 온기를 더해주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오르막길'은 '정상'을 전제로 한다. 끝이 보일 거 같지 않던 오르막길도 오르고 오르다 보면 마침내 드러나고야 마는 '정상'을 준비하고 있다. 다만 그 정상을 오르기 위해 우리는 마음의 채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 것이다. 하마터면 부르트고 꺾일 것 같았던 2012년 그 해, 내가 올랐던 '오르막길'도 결국은 인생의 한 과정이었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 와중에 고맙게도 시기를 맞춘 것처럼 발매된 정인의 '오르막 길'이 아주 오랫동안 내 위안이었음을 생의 끝날까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그무렵부터였을 거다,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이면 빼놓지 않고 이 노래를 꺼내 듣곤 했던 것이. 가사에 담긴 모든 의미가 그 어떤 '입춘첩' 보다 훌륭했으므로 누군가의 성스러운 새해맞이 의식- 가령 몸을 정갈히 하고 새해의 첫 태양을 맞이한다거나, 다이어리를 꺼내 한 해의 'to do list'를 적어보는 것처럼- 나는 '오르막길'의 가사를 찬찬히 음미하며 올 한 해도 기운차게 주어진 나의 길을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 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끝끝내 걸어가 보겠다는 굳센 다짐 말이다.

신은 때로 장난꾸러기 같아서 올해도 우리에게 녹록지 않은 길을 준비해 두셨겠지만, 늘 그렇듯 오르막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갖가지 고통을 우리에게 속속들이 전하겠지만 뭐, 어떤가! 혼자 걷기 힘드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아주 천천히 이 길을 올라가면 될 테다.

예상을 넘어섰던 '북극한파'도 봄을 알리는 절기 입춘을 지나니 위세가 다소 꺾인 듯하다. 다시 한 해의 시작이다. 겨울의 끝에는 '봄의 햇살'이, 오르막길 너머엔 시원한 바람을 품고 있는 너른 '꼭대기'가 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희망으로만 가득 찬 입춘첩 대신, 조금은 힘들겠지만 걸을만한 '오르막길' 하나씩을 마음으로 그려보면서 '새로운 봄', '도전해 봄직한 봄'을 향해 나아가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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