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태양’과 무용 ‘태양’ 비교해 보세요”
지난 2021년 10월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독특한 공상과학(SF) 연극이 공연됐다. 경기도극단 상임 연출가인 김정(39)이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마에카와 도모히로의 희곡을 무대화한 ‘태양’이다. 바이러스가 갈라놓은 인류의 미래를 다룬 이 작품은 당시 코로나19 팬데믹과 맞물려 큰 주목을 받았다.
마에카와가 일본에서 2011년 초연한 ‘태양’의 배경은 21세기 초 생물학 테러가 일어난 지 40여년이 지난 근미래. 테러 직후 전 세계에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인구는 급감하고 모든 사회 기반이 파괴됐다. 감염자 가운데 항체가 생긴 사람들은 높은 지능과 젊은 신체를 가졌지만, 자외선에 약해 밤에 돌아다니는 신인류 ‘녹스’가 된다. 녹스가 점점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과 달리 ‘큐리오’로 불리는 기존 인류는 차별 속에 그 수도 줄어든다.
바이러스로 나뉜 두 인류를 통해 갈등과 공존을 그린 ‘태양’은 근미래를 다뤘지만, 위계와 차별이 만연한 현대사회로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다. ‘태양’은 2011년 요미우리문학상 희곡상을 받았으며, 마에카와는 이 작품으로 요미우리연극상 대상과 최우수 연출상을 거머쥔 바 있다. ‘태양’은 2014년 일본 연극계의 거장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의 연출로 다시 한번 공연되는가 하면 2016년 이리에 유 감독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태양’이 한국에서 약 1년 반 만에 재공연 된다. 초연과 마찬가지로 김정 연출로 3~26일 국립정동극장 무대에 오른다. 초연 당시 이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유인촌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김정화를 필두로 당시 출연진의 대부분이 함께한다. 여기에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 중인 신재범 등이 투입돼 새로운 앙상블을 보여줄 계획이다.
그런데, 올해 ‘태양’은 특별하게 돌아온다. 연극과 함께 현대무용으로도 선보여지기 때문이다. 동명 연극에서 움직임을 맡았던 안무가 이재영(40)이 원작 희곡을 모티브로 만든 동명 무용을 10~12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연출가 김정은 이 작품에서 드라마투르그를 맡았다. 이재영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무용단 시나브로 가슴에가 제작한 무용 ‘태양’은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이기도 하다. 최근 김정과 이재영을 만나 원작 희곡을 연극에 이어 무용으로까지 만들게 된 과정을 들어봤다.
“저와 재영이 형 둘 다 같은 프로듀서(조하나 PD)와 작업하고 있어서 알고는 지냈지만 처음 협업한 것은 2019년 연극 ‘팜’입니다. 재영이 형이 많은 영감을 주기 때문에 ‘팜’ 이후 ‘신의 막내딸 아네모네’ ‘시련’ 등 저의 모든 작업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형이 제시하는 아이디어가 도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번 작품의 경우 재영이 형은 로봇 같은 녹스의 움직임, 거칠고 정리 안 된 큐리오의 움직임으로 양식화해서 제 의도를 잘 드러내 줬어요.”(김정)
국내 연극계에서 안무가가 스태프로 참여해 배우들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사례가 부쩍 많아졌다. 희곡에 등장인물의 동작이나 표정 등을 지시하는 ‘지문’이 나오지만, 연출가들이 더욱 세밀하고 치밀한 움직임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무가들이 연극에 스태프로 참여해 작품의 콘셉트와 배우의 특징에 맞는 움직임을 담당하게 됐다.
“‘팜’ 이후 여러 연출가에게 연락이 왔는데요. 몇몇 분은 단순히 어떤 장면의 움직임을 짜달라고 요청합니다. 저는 일방적으로 배우의 움직임을 만들어주지 않아요. 배우와 함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트레이닝을 하면서 움직임의 콘셉트를 잡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배우가 무대 위 실질적인 움직임을 만들도록 돕죠. 연출가들 대부분 이 과정을 기다리기 힘들어해요. 정이도 처음엔 못 기다렸지만, 점점 신뢰가 쌓이니까 이제는 그 시간을 기다려줍니다.”(이재영)
김정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연출가 한태숙의 조연출로 6년을 보낸 뒤 2015년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으로 연출가 데뷔를 했다. 이후 극작가 고연옥과 손잡고 ‘손님들’(2017) ‘처의 감각’(2018) ‘인간이든 신이든’(2021) 등 문제작 3편을 선보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손님들’로 연극계의 각종 상을 휩쓴 바 있다. ‘태양’은 2018년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에 따른 두산아트센터 기획공연으로 김정이 선택한 작품이다.
“도전적인 작품을 찾던 중 일본 희곡 전문 번역가인 이홍이 씨로부터 ‘태양’을 추천받았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선언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희곡의 완성도 외에 시의성도 있어서 끌렸습니다. 다만 연출가로서 도전할 수 있는 폭이 크지 않아 잠시 망설였는데요. 팬데믹 시기에 새삼 깨달은 무대의 소중함에 ‘태양’이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죠.”(김정)
다만 ‘태양’은 2021년 초연 당시 흥미로운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다소 어렵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관객이 극 초반 작품의 설정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 드라마에 몰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김정은 이번 재연에서는 극 초반부터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장면을 배치할 계획이다. 김정은 “초연에서 두 인류의 대립에 집중하느라 태양이라는 존재를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했다”면서 “태양은 시간을 의미하고, 그 시간은 생명력의 순환을 내포한다. 재연에선 태양의 존재를 초연보다 훨씬 강렬하게 표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재영은 2013년 안무가 권혁과 함께 ‘이퀼리브리엄’을 작업하며 시나브로 가슴에를 창단했다. 2016년 안무가 안지형이 합세하며 3인 안무가 체제를 갖춘 시나브로 가슴에는 이후 본격적으로 작품을 쏟아냈다. 한국 현대무용계를 대표하는 단체 가운데 하나로 ‘휴식’ ‘질주’ ‘제로’ ‘치타슬로우’ ‘신체, 파동, 소리’ ‘구조의 구조’ 등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저는 몸을 쓰는 안무가이다 보니 직관적인 작업을 많이 합니다. 텍스트를 분석하는 연출가와 달리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되죠. 그리고 그에 따라 움직임을 계산해서 만들죠. 정이와 함께 연극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감각과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래도 연극은 서사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만큼 드라마가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태양’을 무용으로까지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는데요. 제목부터 강렬한 이미지로 풀어내기에 적합하다고 봤습니다. 덧붙여 우리 무용단으로서도 그동안 하지 않았던 스타일의 작품을 통해 성장할 수 있길 바랐고요.”(이재영)
무용 ‘태양’의 드라마투르그를 맡았던 김정은 이번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드라마투르그는 작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작업 과정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역할을 한다. 김정의 경우 무용 드라마투르그는 처음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재영은 “정이가 작업 과정을 보면서 계속 질문을 한 것이 내게 큰 자극이 됐다. 그동안 작업하면서 내게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정이의 질문은 내가 작품을 좀 더 철저히 분석하도록 만들었다. 이게 바로 드라마투르그의 역할 아닌가”라며 웃었다. 한편 원작자 마에카와는 10~14일 한국을 방문해 두 ‘태양’을 관람할 예정이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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