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로 세상 사로잡은 한국인… 정성하 “저 천재 아니에요”
10세에 데뷔… 국내 첫 조회수 1억뷰 기록 세워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고 하면 기타리스트 정성하(27)는 샐쭉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천재 중 한 명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천재라고 부른 것 때문에 말이다.
“천재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이는 것 같아요. 저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요즘 일찍 기타를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면 제가 어렸을 때보다 훨씬 잘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제 재능은 꾸준함이라고 생각해요. 10년 넘는 시간 동안 유튜브에 연주 영상 1300개를 올렸으니까요.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정성하는 2006년 열 살 때 그의 기타 연주 동영상을 아버지가 유튜브에 올리면서 ‘유튜브 스타’에 등극했다. 비공식이지만 국내에서 최초 유튜브 구독자 100만명 돌파, 누적 조회수 1억 돌파의 기록을 세운 건 K팝 스타가 아닌 꼬마 시절의 그였다. 자기 몸집 만한 기타를 껴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 비틀스의 ‘렛잇비’, 파헬벨의 캐논 같은 곡을 현란하게 연주하는 모습이 폭풍 클릭을 불렀다.
재능을 알아본 거장들은 그를 세계무대로 이끌었다. 독일 기타리스트 울리 뵈게르샤우젠은 멘토를 자처하며 공연을 주선했고 앨범을 녹음할 수 있게 자신의 녹음실을 내줬다. 프랑스 기타리스트 미셸 오몽은 ‘성하의 왈츠’라는 곡을 작곡해 선물하는가 하면 미국 기타리스트 트레이스 번디와는 미국 5개 도시 투어를 함께하는 등 종종 같이 무대에 서는 사이가 됐다. 12세 때 첫 독주회를 시작으로 독일 태국 미국 핀란드 등 해외 공연이 이어졌다.
이후 그는 고등학교 진학 대신 프로 연주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택했다. 지금까지 9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고 유튜브 구독자 700만명, 조회수 20억이라는 연주자로서는 전례 없는 기록을 써가고 있다. 제이슨 므라즈, 아이유, 지드래곤, 2NE1, 양희은 등과 협연했다. 지난 연말에는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 ‘드리밍’을 펴냈으며 방송 중인 음악 프로그램 ‘비긴어게인-인터미션’(JTBC)에서 임재범 하동균 등과 화음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 20일 서울 성북구 홈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기타를 시작할 때 기억이 나나요?
“기타를 처음 잡은 건 세 살 때였고, 아버지한테 기타를 배우고 나서 세뱃돈을 모아 첫 번째 기타를 샀어요. 쇠줄을 맨 손가락으로 튕기면 물집이 잡히고 아프거든요. 손가락이 아팠던 기억은 있는데 그래서 힘들고 괴로웠다는 기억은 없어요. 그냥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계속 연습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그러다 금세 포기할 줄 아셨대요.”
-기타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줄을 튕기면서 연주하는 기타라는 악기 자체가 재밌었던 것 같아요.”
-피아노도 배웠는데 흥미가 없었다고요.
“초등학교 때 레슨을 받았는데 그만 치고 나가서 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웃음). 5번씩 연습하는 게 숙제였는데 한 번 치고 두 번 친 걸로 체크하고 그랬어요.”
그에게는 기타가 운명이었던 듯하다. 어쿠스틱 기타를 친다고 하면 대개 노래 반주를 떠올리는데, 그는 그것과 달리 멜로디와 화음, 리듬을 기타 한 대로 표현하는 핑거스타일 기타리스트다. 음악을 배웠다고 할 수 있는 건 초등학생 때 몇 개월 다닌 클래식 기타 학원과 스무 살 때 입학한 서울재즈아카데미 1년이 전부로, 사실상 독학으로 기타를 익혔다. 11세쯤에는 작곡을 시작했다.
그는 팝송 재즈 클래식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데, 라이브 방송에서 신청곡이 들어오면 처음 듣는 곡도 즉흥적으로 기타로 편곡해 연주한다. 곡을 듣고 악보로 옮기는 채보를 거치지 않고 듣고 따라 치고 외워버리는 것. 문외한이 보기엔 진기명기에 가까운데 “일찍부터 훈련이 돼서 그렇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누구나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죠. 고졸 검정고시를 본 후에 대학 대신 서울재즈아카데미를 택했어요.
“요즘은 옛날만큼 대학 진학이 필수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미 하는 일이 있었고 그걸 계속하려면 학교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때 제 상황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른 나이에 진로가 정해졌는데 다른 길을 가고 싶다는 꿈은 없었나요.
“기타 말고 다른 생각 자체를 못 했던 것 같아요. 중학생이 되기 전에 이미 프로 기타리스트가 꿈이었거든요. 제가 정말 기타에 미쳐서 초등학교 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영어 학습지 숙제를 했어요. 부모님이 음악과 공부를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기타를 1분이라도 더 치려고 공부를 미리 끝냈던 거예요.”
-짧은 학창 시절에 대한 아쉬움은요?
“있죠. 고등학교는 굉장히 가고 싶었거든요. 중학교 때 정말 즐겁고 행복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생활은 어땠을까 가끔 생각이 들긴 해요. 궁금하고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그 기간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거든요. 한 달에 두세 번씩 해외 투어를 하고 매년 앨범을 냈어요. 어떤 선택이든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해요.”
기타리스트로서 그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 중 하나는 그의 시그니처 기타다. 독일 하이엔드 브랜드 레이크우드, 핑거스타일 연주에 특화된 중국 나가 브랜드가 정성하 시그니처 모델을 발매했다. 뮤지션의 이름을 걸고 판매하는 기타인 만큼 인지도가 높은 소수의 기타리스트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국내 뮤지션 중에 시그니처 기타를 갖고 계신 분들이 또 있나요.
“장범준 형님과 아이유님이 국내 브랜드와 협업한 시그니처 모델이 있어요. 해외 하이엔드급 어쿠스틱 기타 중에는 없는 걸로 알아요.”
-음악 프로그램에 고정으로 출연하는 건 ‘비긴어게인’이 처음인 거죠? 늦은 감이 있는데요.
“제가 세션이 아니라 프론트맨으로 무대 가운데 서서 제 연주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이번에 기회를 주셔서 2, 3주 만에 거의 20곡을 편곡해서 합주하고 촬영을 했어요. 좋은 경험이었고 재밌게 했어요.”
-웬만한 음악인은 넘보기 힘든 경력을 쌓아왔는데 성하씨를 비긴어게인에서 처음 본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보컬이 있는 음악을 선호하기 때문에 제 구독자의 95% 이상이 해외 팬분들이에요. 저도 국내보다 해외 공연 빈도가 훨씬 높고요. 인스트루멘탈(악기 연주만 있는 음악)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 그 매력을 모르신다고 생각해요. 제가 더 열심히 활동하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보다 많은 분들이 인스트루멘탈을 더 들어주시지 않을까요.”
-흔히 ‘한국의 3대 기타리스트’라고 김태원 김도균 신대철씨를 꼽잖아요. 세 분 다 록밴드 출신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들이라 어쿠스틱 기타리스트들이 서운하겠다 싶어요.
“저희 어쿠스틱 기타 연주자들보다는 일렉 기타 연주자들을 더 좋아해 주시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음악에 순위를 매기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개개인마다 톱3 기타리스트를 뽑으라면 아마 다 다를 거예요. 저도 개인적으로는 존 메이어, 토미 이매뉴얼, 코타로 오시오, 이렇게 세 분을 굉장히 좋아하고요.”
-지난해 새 앨범 ‘포이트리’에 이어 책을 냈죠. 책을 쓴 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해 얘기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고요. 서울재즈아카데미 동기들 얘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때 제 어머니뻘 되는 분, 학교 중퇴하고 온 10대 친구들, 30~4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모였어요. 진짜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 뭔지 알고 그것에 대한 열망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가 됐든 그 꿈에 뛰어드는 것 같아요. 다른 일을 하면서도 계속 생각나고 계속 쳐다보게 되는 그런 일이 있잖아요. 생업을 그만두고 온 분들은 진짜 큰 결심을 한 건데, 무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늦게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꿈 외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을지라도 온전한 행복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동기 중에 음악을 계속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것 또한 중요한데 그게 잘 안 되는 분들도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쪽도 극소수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경쟁이 치열한 직업이다 보니 한계를 느끼는 분도 계셨을 거고, 생각보다 본인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분도 계셨을 거예요. 제 또래 중에 명문대를 다니다 휴학을 하고 온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대학 졸업은 하라는 부모님 뜻에 따라 복학해서 대학을 마친 후에 음악으로 전향했어요. 미국 재즈클럽에서 공연을 많이 하더라고요.”
-10대들이 조언을 구하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어떤 답을 주나요.
“기타를 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럼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일찍부터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게 맞다고 말씀을 드려요. 그리고 포기하지 말라고요.”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정체기나 슬럼프가 올 수 있잖아요. 벌써 데뷔 17년차인데 어떤가요.
“저는 큰 슬럼프가 없었어요. 연주가 안 되는 날은 그냥 기타를 놓아버려요. 안 된다고 너무 신경 쓰다 보면 자책하게 되고, 그럼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어서요. 어느 순간 다시 기타를 잡고 싶어지고, 그때 연주하면 금방 또 즐거워져요. 좋아하는 일이라도 업이 되면 스트레스가 되는 순간이 있잖아요. 힘들 때는 무작정 버틸 것이 아니라 놓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연습을 쉬면 손가락이 안다고 표현하는 연주자도 있던데요.
“저는 신병훈련소 한 달 동안 기타를 못 쳤는데도 괜찮았어요(웃음). 기타에서 손가락이 빨라야 한다는 건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악기를 통해서 어떤 음악을 하느냐, 어떻게 내 이야기를 전달하느냐가 제일 큰 부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테크닉을 고민할 시기는 지났다는 말씀이네요.
“물론 저보다 테크닉이 뛰어나신 분들도 많고 제가 테크닉을 더 깊숙이 파고든다면 갈 길이 훨씬 멀지만 제 지향점은 그게 아닌 거죠. 테크닉보다 음악적인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음악적인 것들은 기타를 붙잡고만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기타 외적인 요소에서도 영감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기타로 맨 처음 동요 ‘섬집 아기’를 배웠던 그 순간부터 그는 쉼 없이 성장하고 있다. 18세에 발표한 4집 ‘모노로그’는 직접 프로듀싱을 시작했고 그다음 해 ‘라뜰리에’ 앨범은 재킷부터 전체 콘셉트를 직접 구상했다. 21세 때 내놓은 7집 ‘믹스테이프’부터는 집에 마련한 스튜디오에서 혼자 녹음하기 시작했다. 한국 가요사의 레전드 기타리스트 함춘호는 ‘정성하의 소리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의 소리는 점점 더 깊어진다’고 평했다.
-무대를 같이 했거나 협업한 아티스트 목록이 정말 길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은 역시 팝스타 제이슨 므라즈일까요.
“제이슨 므라즈가 제가 유튜브에 올린 ‘아임 유어스’를 카피해서 연주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어요. 내한해서 저를 공연에 초청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는데 제가 일본 투어 중이라 못 만났고, 그다음 서울 공연 마지막 피날레 때 제가 같이 무대에 올랐어요. 3곡을 함께 연주했는데 좋아하는 팝 가수가 저에게 러브콜을 했고, 제가 편곡해서 연주한 그대로 그분이 공연을 한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같은 무대에 섰다는 것도 너무 값진 경험이었고요.”
-이제 20대 후반이니까 갈 길이 멀잖아요.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는 어떨 것 같으세요.
“똑같은 길을 따라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피아니스트 이루마님을 존경해요. 이루마님처럼 제가 쓴 곡으로 알려지는 게 목표 중 하나예요. 음악적인 고민은 계속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곡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성하의 아이덴티티를 뚜렷하게 만들 수 있을까, 평생 끝낼 수 없는 고민이겠죠.”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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