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아프다면 [안태환 리포트] 

이영수 2023. 2. 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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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태환 의사, 칼럼리스트

큰 병이 찾아오면 인생은 영화의 상영 전과 암전 후의 차이만큼 명암이 극명해진다. 생계를 위해 숨 가빴던 일상을 비집고 들어선 질병은 소홀했던 건강에 대한 필연적 결과이지만 선 듯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인간의 존재를 기어코 아득한 암전에 밀어 넣는다. 그 후 아프기 전과 후의 삶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다. 사실 아프기 전의 일상적 고민들은 깃털처럼 가벼운 잡념이었음도 이 시기에 자각한다. 질병 앞에 속절없는 무기력함은 인간의 나약함을 여실히 증명해낸다. 아프기 전과 후의 삶은 그렇게 존재에 대한 분별의 시간을 허락해 준다. 

불현듯 찾아든 질병 앞에서 희망이라는 단단함을 보이기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그래도 속절없이 찾아온 병마로 인해 암울하고 희망 없는 날에도 꾸역꾸역 삶은 계속된다. 고백하건대 직업으로서 타인의 몸을 돌보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날들이었다. 나이 오십 고개를 훌쩍 넘어가면서도 푸른 나이라 우겨가며 믿고 산 일상이었다. 그간의 오만을 질책하듯 아픈 날들이 간헐적으로 찾아 들고 있다. 이 나이에는 그리 큰 병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대다수 사람들의 대책 없는 우격다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리되지 못하는 육신은 누구에게도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 다행히 큰 병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건강에 세심하지 못한다면 장담할 일은 아닐 터이다.  

의사로서 곁을 지킨 대다수의 환자들은 치료가 길고 지난한 질병이 찾아 들면 이를 어찌 해야 할지 참으로 지난하고 황망하다고 말한다. 무엇을 해야 될지 어떻게 번잡한 일상을 정리해낼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고충을 토로하기도 한다. 삶의 희망이 느슨해지는 것이다. 하긴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질병으로 지친 나를 마주할 때의 자괴감을 다스리는 것도 매한가지다. 결국 무엇으로 힘들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로 고민을 토로하는 환자에게 예외 없이 해주는 조언이 있다. ‘조금이라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들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것이 합리적이며 온전한 선택이다. 경제적 궁핍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우린 아프면서도 온전한 나에 대한 근심보다 주변에 대한 걱정을 달고 산다. 우매한 일이다. 아프면 모든 것이 부질없다. 가족에 대한 염려도 나의 건강이 전제되어야 수반될 인생의 무게이다.

열렬했던 막스 베버는 호기 있게 “분노도 편견도 없이” 살아가라 이야기하지만 사람의 군집 내에서 인연 속에서 어찌 그리 쉬운 일이던가. 아프고 나면 밀물처럼 쏟아져 오는 사람에 대한 실망들은 지극히 당연한 감정이다. 그토록 천착했던 인간관계는 큰 병이 찾아 들고 일상이 멈추게 되면 무용지물이 된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처럼 미움의 분노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현실 속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그 독립된 자아의 힘으로 존재를 찾아가면 될 터이다. 그래서 때론 질병은 성찰의 단초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생을 살다 보면 역지사지의 현실들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 든다. 미처 몰랐던 상황에 직면해져서야 가까운 이들의 입장이 느껴진다. 그래서 공감은 관계의 근간이다. 질병 앞에 감당 못할 무기력으로 홀로 나약해지는 인간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병이 들면 일상에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또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감도 쇠약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면, 아픈 이의 존재는 더더욱 작아진다. 사람은 무척이나 그립게 된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부단히도 저항하고 자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립적인 것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 그건 틀림없다. 만물의 섭리가 그러하다. 인간이 고독하다는 것은 홀로 서있다는 실존적 현상이다. 판에 막힌 주어진 틀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호기롭게 상상하고 무언가를 도모할 때 비로소 발전하고 진일보 할 수 있다. 설령 많이 아프더라도 결코 조바심 내지 말며 설령 무리 속에서 이탈해 잠깐 고독해지더라도 단단하게 여물어진 육신과 정신을 부단하게 채비하는 일은 그래서 아픈 이들에게 더없이 중요하다. 

누구나 삶의 시작은 익숙함을 향해 간다. 삶은 끝없는 익숙하기 위한 숙련의 과정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익숙하지 않은 질병이 찾아 들면 그 앞에서 자신의 존재부터 개맹이 같은 태도로 보듬어야 한다. 질병은 가리사니의 마중물이다. 그것이 아픈 이들이 질병을 대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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