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처럼 일어설 것"…처절했던 '죽음의 다리' 옆은 분주했다 [우크라이나 르포]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중심에서 차로 30분쯤 가자 눈앞이 온통 잿빛이었다. 아파트·주택은 대부분 박살 났고, 그나마 성한 곳도 온통 총탄 흔적 일색이었다. 러시아의 침공 1년을 앞두고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키이우의 관문 격인 이르핀‧부차‧보로댠카 등을 찾았다. 러시아군이 지난해 2월 말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 북부 국경에서 밀고 들어와 3월 말 퇴각 전까지 무참히 짓밟은 곳이다.
이르핀에 재건되는 ‘희망의 다리’
지난해 3월 초 러시아군이 이르핀강을 통해 키이우로 진격하는 걸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군이 폭파한 다리 쪽으로 갔다. 당시 인근에서 러시아군이 퍼부은 포격을 피해 수십명의 피란민들이 잔해 속에 몸을 숨겼다. 오도 가도 못한 채 교각 밑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을 AP 통신이 포착해 전 세계에 전하면서 ‘죽음의 다리’로 각인됐다. 우크라이나는 피란민의 피와 눈물이 서린 이 현장을 보존하기로 하고, 옆에 새로운 다리를 놓고 있었다.
파괴된 집을 보여주겠다는 안드레이(53)를 따라 한 아파트로 들어갔다. 한때 그의 안식처였던 이르핀 세베르닙스크 162번지에는 멀쩡한 가구가 하나도 없고, 창문이 죄다 깨져 유리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다. 안드레이는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지만, 집을 반드시 고칠 것”이라고 했다.
키이우 경제연구소가 조사한 우크라이나 기반시설 피해 총액은 지난해 11월 기준 1359억 달러(약 166조원). 주거용 건물(525억 달러), 교통 인프라(356억 달러), 산업시설(약 130억 달러) 등이 큰 피해를 봤다. 우크라이나 측이 추산한 복구 비용은 1조 달러(약 1220조원)에 이른다. 세계은행(WB)은 최대 6000억 달러(약 732조원)로 추산했다. 전쟁이 계속될 수록 피해액과 복구비용은 늘어날 전망이다. 재건을 돕기 위해 지난해 미국 등 40여 개국이 두 차례 회의를 열었다.
‘한강의 기적’ 재건 모델로 꼽혀
우크라이나는 전후 재건 모델로 독일과 한국을 꼽고 있다. 특히 한국이 6.25 전쟁(1950~53년) 후 일군 ‘한강의 기적’은 우크라이나 출판사 ‘페룬’이 발행한 10학년(한국 고교 2학년)용 세계지리 교과서에 실렸다. 김형태 주우크라이나 한국대사는 “페룬 세계지리 교과서는 공인 교과서 채택이 유력하다”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256쪽 분량의 실물 교과서를 확인한 결과 6쪽에 걸쳐 한국의 경제 성장 등을 실었다. 현지에서 만난 율리안 브레이셰프스키 국립셰브첸코대 지리학부 교수는 “한국은 개발에 먼저 집중하고, 교육을 강조함으로써 지금의 발전에 이르렀다”며 “이를 본받아 우크라이나는 기존 농업 외에 IT 인력과 군사 장비 분야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앞서 우크라이나 교육과학부 관계자도 “한국이 전후에 어떻게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는지, 그 원동력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경제 재건을 위한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올해 우크라이나 당국자 등을 초청해 6.25 전쟁 이후 발전 경험과 개발전략 등을 공유할 계획이다.
전쟁 트라우마 회복은 아직 멀어
물적 피해와 함께 우크라이나인에겐 정신적 고통 치유도 과제다. 심리 전문가들이 지난해 7~9월 18세 이상 성인 2004명을 조사한 결과 약 40%가 심각한 전쟁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다. 공습 소리, 폭격 경험, 시신 발견 등으로 인해 우울증,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다. 특히 민간인 시신 수백구와 악랄한 고문 장소 등이 발견된 부차·이르핀 등에선 다수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르핀의 부서진 아파트 단지 내 벤치에 앉아있던 올렉산드르(64)는 인터뷰 요청에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러시아군이 쏘는 로켓포 환청에 시달린다는 그는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도 한참을 머뭇댔다.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이곳에서 그들(러시아군)을 보았는데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집단 매장지였던 부차의 성 안드레이 정교회 성당 앞뜰에서 만난 예브게니(52)도 당시 상황을 묻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20대 남자 2명이 휴대전화에 우크라이나 국기 사진이 있다는 이유로 사살당한 뒤 불태워졌다”면서 “병원에 민간인 시신이 꽉 찬 나머지 이곳 성당까지 매장지로 쓰였다”고 밝혔다. 또 “골목마다 러시아군이 행인의 옷을 벗겨 친우크라이나 문신을 찾고, 소지품을 뒤져 물건을 훔치는 통에 한달간 ‘스트립쇼’를 해야 했다”며 몸서리를 쳤다.
스스로 치유의 길 만드는 우크라
그럼에도 이들은 치유의 길을 찾고 있다. 예브게니는 ‘전쟁 해설사’가 됐다. 부차를 찾는 외지인을 데리고 도시 곳곳을 다니며 무료로 당시 상황을 설명해준다. 이날도 독일에서 온 우크라이나 기부 기금 마련 단체 인사들을 안내했다. 보로댠카 주민들은 우크라이나 동부 전선으로 식량 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자원봉사자 알료나는 “우리도 풍족하진 않지만 더 힘든 곳에 나눠줘야 한다”면서 “식량 외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신발·분유·장난감도 보낸다”고 전했다.
키이우로 돌아오는 길에 우크라이나 동서를 가르는 드니프로강이 보였다. 한강의 기적에 버금가는 ‘드니프로강의 기적’을 이루길 기원한다.
※우크라이나 르포 4회로 이어집니다.
■ '러·우크라 전쟁 1년' 디지털 스페셜 만나보세요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월 1일부터 디지털 아카이브 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전쟁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비극에 끝은 있는지,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맞대응 등 지난 1년의 기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 보기 ☞ https://www.joongang.co.kr/digitalspecial/479
」
키이우=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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