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 연설은 푸틴의 총보다 강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지음, 박누리 박상현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16쪽, 1만6000원
지난해 2월 24일 새벽 4시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됐다. 이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순 없지만 지난 1년간 우크라이나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훌륭하게 싸워왔다는 건 분명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21세기 초반의 세계사에 굵직하게 기록될 이 항전의 중심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있다.
코미디언 출신의 40대 정치 초짜 대통령 젤렌스키는 개전 직후 미국이 국외 피신 비행편을 제공하겠다고 하자 “내게 필요한 건 탈 것이 아니라 탄약입니다”라면서 거부했다. 그리고 카키색 옷차림으로 정부청사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군인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민 사회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처럼 앞으로도 변함없이 독립 국가일 것입니다.”
32초 분량의 이 연설은 젤렌스키의 연설 중 가장 짧은 연설이자 가장 중요한 연설로 꼽힌다. 젤렌스키는 연설을 통해 국민들의 불안을 달래고 단결시켰으며, 세계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자인 아르카디 오스토로프스키는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푸틴이라면 이 전쟁을 서술하는 이는 젤렌스키이다”라고 평가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메시지’는 젤렌스키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2019년 이후 3년간 국민과 세계를 상대로 해온 연설 중 19편을 골라 묶었다. 젤렌스키가 이 책에 수록할 연설문을 고르고 서문을 썼다.
지금 세계가 ‘우크라이나 정신’이라고 부르며 감동하는 항전의 내러티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이번 전쟁이 우크라이나와 세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정치가의 말이 한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준다.
맨 앞에 수록된 2019년 5월 20일 대통령 취임 연설부터 파격적이다. 그 파격은 거창하지 않음, 무겁지 않음, 어렵지 않음, 그리고 감성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이야기, 명료한 메시지에서 나온다. 그는 지루하고 모호하고 믿을 수 없는 정치 언어를 답습하지 않는다.
취임사는 여섯 살짜리 아들의 이야기로 시작해 우크라이나인들이 공유하는 꿈에 대해서 말한다. 유럽 국가가 되는 것, 2014년부터 이어지는 돈바스에서의 전쟁을 끝내는 것, 강제 병합당한 크름반도를 되돌려받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우크라이나가 단결하는 것이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젤렌스키는 힘을 합치면 원하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거듭 말한다. “우크라이나 사람이 우크라이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젤렌스키의 핵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젤렌스키는 전쟁 개시 직전 러시아 국민들을 향해서 러시아어로 연설했다. “우리는 이곳이 우리 땅이기 때문에 싸웁니다. 이것은 우리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싸우겠습니까?”
전쟁 개시 직후엔 우크라이나 국민을 향해서 “우리 모두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알리며 “겁내지 마십시오”라고 연설했다. 그는 연설을 통해 불안이 퍼지는 걸 막고 회의론을 잠재우고 용기를 이끌어냈다. 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고, 지친 국민들과 함께 기도하고, ‘위대한 우크라이나’라는 서사를 만들어갔다. “이 나라는 울지 않았고, 소리 지르지 않았으며, 겁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이 나라는 도망가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으며, 잊지도 않았습니다.”
젤렌스키의 연설은 세계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힘을 발휘했다. 국제 여론전에서 푸틴은 완패했다. 젤렌스키는 개전 13일 만에 화상으로 영국 의회 연설을 했고, 그 후로 세계를 상대로 100번 넘는 연설을 했다.
그는 “키이우에 폭탄이 떨어지면 유럽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이 투쟁은 우크라이나와 미국, 그리고 전 세계가 민주주의 체제로 남게 될지를 결정할 것”이라며, “이건 지정학적 문제가 아닌 가치의 문제”라며 각국의 행동을 촉구했다. 그의 연설은 세계의 시민들, 특히 젊은 세대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책은 영국과 미국, 유럽에서 동시 발간된 지 세 달만에 국내에 번역됐다. 한국어판에는 젤렌스키가 2022년 12월 처음으로 전쟁터를 떠나 미국을 방문해 연설한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를 추가로 수록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우크라이나를 기억하고 지지하는 방법이 된다. 인세 전액은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 설립된 유나이티드24(u24.gov.ua)에 기부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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