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나의 배추적 이야기

김나래 입력 2023. 2. 2.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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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적'(배추전)이란 음식을 처음 먹은 건 15년 전쯤이었다.

경북 영주 태생인 시어머니는 명절 때면 배추와 쪽파, 메밀 반죽으로 전을 부쳐주셨다.

다른 전을 만들 때는 나도 거들었지만, 이 음식만큼은 어머니가 혼자 다 하셨다.

배추전이 내 입에도 맛있어진 건, 아이를 낳아 키우고도 한참 나중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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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래 온라인뉴스부장


‘배추적’(배추전)이란 음식을 처음 먹은 건 15년 전쯤이었다. 경북 영주 태생인 시어머니는 명절 때면 배추와 쪽파, 메밀 반죽으로 전을 부쳐주셨다. 커다란 팬에 콩기름과 들기름을 적당히 섞어 두르고 맨손으로 배추와 쪽파를 턱, 올리셨다. 배추를 데치는 대신 줄기 부위를 손으로 그저 꺾어서 몇 번 눌러주곤, 전날 만들어둔 메밀 반죽을 국자로 떠서 배추 위에 부었다. ‘적당히 익었다’ 싶을 때 뒤집고, ‘다 됐다’ 하면서 팬에서 채반으로 옮겼다. 다른 전을 만들 때는 나도 거들었지만, 이 음식만큼은 어머니가 혼자 다 하셨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 심심하고 밍밍한 음식에서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배추전이 내 입에도 맛있어진 건, 아이를 낳아 키우고도 한참 나중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달큼한 겨울 배추, 쪽파 특유의 향, 밀가루와는 또 다른 메밀 반죽의 식감까지 재료 본연의 맛이 어머니의 손맛과 겹쳐진 그 맛이 좋았다.

이 음식에 유난히 남다른 애정을 품게 된 건 안동 출생 칼럼니스트 김서령의 책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읽은 후부터다. 작가의 어린 시절, 엄마와 아지매들이 겨울밤에 해 먹던 배추적은 ‘조금씩 속이 썩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는 것’이었단다. 그는 “배추적은 깊은 맛을 가진 음식이었다”며 “깊은 맛은 혀에서만 단, 달게 먹고 난 후에 조금 민망해지는 ‘얕은 맛’의 반대”라고 적었다. 1940년대 태어난 어머니의 삶 또한 책 속 여인들의 것처럼 적잖이 고됐음을 모르진 않았지만, 왠지 어머니가 말하지 않던 음식의 속사정을 작가의 고담한 글로 대신 듣게 된 것 같아 기뻤다.

언제든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배추적을 지난 명절 때부터 먹지 못했다. 지병으로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진 어머니는 점점 부엌에 들어가지 못했고, 지난 설 때는 줄곧 병원에 계셔야만 했다. 대신 전통시장에서 파는 배추적을 사다 먹긴 했지만, 배추적이되 배추적은 아닌 맛이었다. 진즉 배워둘 걸, 어머니가 만드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두기라도 할 걸,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래도 요즘은 어떤 요리든 그대로 따라하기만 된다는 요리 선생님들이 넘쳐나고, 1분짜리부터 다양한 분량의 요리 동영상이 가득한 세상이 아니던가. 인터넷에서 배추적 레시피를 찾아봤다. 정말 다양한 버전이 보였는데 그중엔 밀가루 반죽에 새우 가루를 넣어 감칠맛을 내라거나 그게 귀찮으면 새우 과자를 부숴서 그 가루를 넣으라는 조리법도 있었다. 재료의 깊은 맛이 생명인 음식인데, 얕은맛으로 둔갑시킨 레시피에 나도 모르게 입이 썼다.

먹는 것에 관해선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세상 같지만, 이렇게 세월의 흐름 속에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맛’들이 있다. 내가 배추전 이야기를 하자 한 지인은 갑자기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냉장고 속 어머니가 해주셨던 장아찌 반찬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워 눈물로 한 입씩 며칠을 베어 먹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어머니가 해준 음식이 없어지면 어머니의 흔적도 다 같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조기를 넣고 끓인 엄마의 미역국이, 다른 이에겐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엄마의 무지짐이 그런 음식일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올해는 그렇게 ‘사라져가는 맛’을 기록하고 조금이나마 더 붙잡아보겠다고 다짐한다. 식품산업의 발달로 집밥보다 맛있는 시판 음식이 넘쳐나면서 전 국민의 입맛이 획일화하는 시대. 전국 맛집 음식을 밀키트로 주문해 직접 가서 줄 서지 않고도 뚝딱 해먹을 수 있는 시대에 이런 생각은 어울리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올해는 꼭, 어머니가 하던 방식 그대로 배추적 만드는 법을 배워둬야겠다. 그 맛이 이 땅에서 사라지기 전에.

김나래 온라인뉴스부장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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