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대체 샘플' 제시하며 한국인 우롱하는 일본 정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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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1월 30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관련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국장과 한일국장급협의를 마친 뒤 청사를 떠나고 있다. |
ⓒ 권우성 |
한일 외교부 국장급 협의 다음 날인 1월 31일, <지지통신>은 '담화 계승, 대한 규제 완화 검토'라는 기사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 기업의 책임을 떠안는 방안을 확정하면 일본 정부가 그런 식의 입장 표명을 할 수 있다고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명시한 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수상 담화나, 2015년 아베 신조 수상이 발표한 '전후 70년 담화'를 계승하는 자세를 표시하는 안이 부상했다."
일본 정부 내에서 1995년 무라야마 담화 또는 2015년 아베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표명하는 방안이 떠오르고 있다는 보도다. 징용 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하겠다는 게 아니다. 기존에 했던 사과 담화를 그대로 반복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기존 담화에 담긴 정신을 계승하겠노라고 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입장은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문제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나서서 배상하는 일은 물론이고 사과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지지통신>은 "반성이나 사죄를 재차 언급하는 것에는 자민당 내의 반대론도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본 극우세력은 '거듭거듭 사과했는데도 한국이 계속 사과를 요구하므로 더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며 짜증 내고 있다. 그동안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사과했는지를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사과는 배상이 수반되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수명이 길지 않은 것도 문제다. 사과한 지 얼마 안 돼 자민당이나 정부 고위인사가 공개 망언으로 한국을 자극한 일이 한두 번 아니었다. 또한 역사교과서 왜곡을 통해 과거 범죄를 은폐하거나 미화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줬으니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극우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지금의 자민당이다. "자민당 내의 반대론도 예상"되기 때문에 새로운 사과를 할 수는 없으므로, 무라야마 담화나 아베 담화에 대한 계승 의지를 표명하는 선에서 끝내자는 게 일본 정부의 입장이다. 그런 입장 표명을 '사과 대체물'로 받아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최종 입장이 정리되지 않은 듯하므로 일본 정부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라고 선언할지, '아베 담화를 계승하겠다'라고 선언할지, 아니면 '무라야마 담화와 아베 담화를 계승하겠다'라고 선언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제3의 담화가 부각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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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이 1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후나코시 다케히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 일제 강제징용 배상 관련 한일 국장급 협의를 마치고 백브리핑을 하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배상은 물론이고 사과를 요구하며 80년 가까이 투쟁해온 이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하는 것도 아니고 '이전의 사과 담화를 계승하겠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어려워 보인다.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담화나 아베 담화를 샘플로 내놓고 있지만, 이런 담화들이 과연 계승할 만한 것인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나 유족 혹은 피해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제3자가 볼 때도 쉽게 납득되지 않은 내용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일본사회당·신당사키가케 연정 하의 무라야마 도미이치(사회당) 총리가 1995년 8월 15일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는 아시아 각국에 손해와 고통을 준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해 "통절한 반성의 뜻을 나타내고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합니다"라는 문구를 담았다.
표현은 상당히 절절했다. 하지만 손해 복구와 고통 치유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역사 연구와 국제교류를 지원하고 평화 우호를 증진시키겠다고 약속했을 뿐이다. 피해자들을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를 잘 가르치고 피해국들과 자주 교류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그나마 그 역사교육도 올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계속되고 있다.
그런 무라야마 담화가 그 이후 역대 담화의 모델이 됐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05년 고이즈미 담화, 2010년 간 나오토 담화, 2015년 아베 담화 때도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가 언급됐다.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 여러 담화 중에서 아베 담화가 무라야마 담화와 함께 기시다 내각 내에서 부상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아베 신조 피격으로 다소 약해지기는 했지만 아베파가 여전히 자민당을 주도하는 일본 정치 상황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8월 14일 발표된 아베 담화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언급했다는 점에서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라야마 담화를 무력화시키는 요소도 동시에 담고 있었다.
무라야마 담화는 여러 한계를 갖고 있지만, 과거의 일본이 잘못된 길을 걸었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는 담화였다. 이 담화는 "과거의 과오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전쟁의 비참함을 젊은 세대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을 그르쳐 전쟁으로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트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라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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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30일 오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관련 한일국장급 협의가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회원들이 ‘굴욕 매국협상 중단’을 촉구하는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
ⓒ 권우성 |
그뿐 아니었다. 사과도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으로 대신했다. "우리나라는 앞선 대전에서의 행동에 관해 거듭해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해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사과한다'고 하지 않고 '거듭 사과했다'고 말했다. 사과를 할 만큼 했다는 메시지를 표시했던 것이다.
또 사죄의 마음을 이미 행동으로 증명했다고 말했다. "그런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 대만, 한국, 중국 등 이웃사람인 아시아인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며 전후 일관되게 그런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을 다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죄를 증명하는 기본 방식인 피해 복구나 배상이 없었는데도, 사죄를 행동으로 다 증명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베 담화는 생뚱맞은 내용도 담았다. 피해국가들에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서 미국 같은 서방 국가들에는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다. 이 담화는 지금의 일본이 있게 된 데는 미국 등의 도움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 등의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해 지금의 번영을 이룬 나라가 엉뚱한 쪽에 감사를 표시한 것이다. 일본의 번영을 가능케 한 원동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런 문장이 나왔다.
"그것은 선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함께, 적으로서 치열하게 싸운 미국, 호주, 유럽 국가들을 비롯해 참으로 많은 나라들이 은원을 초월해 선의와 지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덕분입니다."
세계인들이 일본 총리 담화에 대해 기대하는 것은 과거 범죄에 대한 반성과 사죄다. 그런데 아베 담화는 사과해야 할 대상에게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일본을 제압한 미국 등에는 감사의 뜻을 확실히 표시했다.
그런 아베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하는 방식으로는 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을 움직일 수 없다.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밖에 되지 않는다.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선언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오십보백보의 차이에 불과하다.
죽기 전에 사과를 꼭 받고 싶다는 징용 피해자들을 상대로 일본은 '사과 샘플'도 아닌 '사과 대체물 샘플'을 제시하며 반응을 관찰하고 있다. 그나마 둘 중 하나는 아베 담화다. 한국인을 우롱하는 일본 정부의 비인간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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