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9)안나 카레리나 | ‘사모바르’에 물 끓이고 레몬 동동 ‘러시안 티’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3. 1. 3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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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이보다 더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이 있을까?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은 사람은 거의 없어도 이 첫 문장 만큼은 알고 있는 이가 꽤 많을 터다.

동시대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고 극찬한, 영미권 작가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뽑은 세계 최고의 소설. 레닌이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작품…. 이토록 화려한 수식어를 자랑하는 <안나 카레니나>는 거의 20여 차례나 영화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는 1948년 작품, 1997년 작품, 그리고 2012년 작품이다.

세계적인 작품답게 여주인공 안나 역할을 맡은 배우 면면도 화려하다. 각각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 키이라 나이틀리가 타이틀롤을 맡았다. <라붐>으로 전 세계에 청순미 붐을 일으켰던 소피 마르소가 처음 안나 카레리나 역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은 영화팬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소피 마르소는 예의 그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푸른 눈의 마력을 마구 뽐내며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그래서(?) 끝내 불행해진’ 안나 카레니나를 절절하게 구현해냈다.

전형적인 미인 소피 마르소에 비해 키이라 나이틀리는 보다 정제되지 않은 현대적이면서도 심히 관능적인 안나를 선보였다. 동시에 21세기에 걸맞게 훨씬 자기주도적이고 강인한 안나를 그려냈다. (이런 다양한 이유로 하루 날 잡아 두 작품을 동시에 보며 즐기는 것도 강추!)

영화에서는 덜 부각됐지만, 작품의 진짜 주인공을 안나와 안나의 불륜 상대인 브론스키 백작이라기보다는 레빈과 키티로 보는 이도 많다. 특히 레빈은 ‘바르게 사는 삶’에 집착했던 톨스토이가 자신을 가장 많이 투영시키고 애정을 가진 인물이라는 게 통설이다.

화려하고 가식적인 사교계를 좋아하지 않고 대신 고향에서 자신의 농노들과 농사지으며 사는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시골 귀족 레빈은 친구의 처제인 귀족 아가씨 키티를 좋아한다. 키티는 안나 올케의 여동생으로 안나와도 밀접하게 얽혀있다(결국 안나의 오빠가 레빈의 절친이라는 이야기). 레빈의 고백을 받았을 때 이미 키티는 브론스키 백작에게 빠져있었다. 하긴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18세 어린 아가씨 눈에 순박하고 성실한 레빈보다는 세련되고 잘생긴 브론스키가 훨씬 멋지지 않았겠나.

그러나 금세 자신과 약혼이라도 할 것처럼 굴던 브론스키 백작이 형부의 여동생인 유부녀 안나와 불륜에 빠져버리자 순진한 아가씨 키티는 깊은 슬픔에 침잠한다. 깊은 슬픔은 건강까지 망치는 법. 결국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진 키티는 독일로 요양을 가 힘들게 건강을 회복하고,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는 우연하게 다시 만난 레빈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어려운 시절을 겪어내는 와중에 한결 성숙해진 키티가 드디어 레빈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본 덕분이다.

그렇게 레빈과 함께 레빈의 고향으로 가서 키티는 시골 지주 부인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아이 낳고 행복하게 사는 두 사람의 소박한 보금자리 한편 식탁 위에 정물처럼 턱하니 놓여있는 물건이 하나 있다. 주전자 같기도 하고 물통 같기도 한 이 물건의 이름은 러시아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사모바르’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한 장면. 뒤편으로 러시아 가정집의 필수품인 찻주전자 ‘사모바르’가 보인다.
‘사모바르’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난생 처음 들어봤다는 독자 분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스스로 끓이는 것’이라는 어원을 가진 ‘사모바르’는 ‘진짜 유럽 홍차의 원조’라는 러시아 가정의 필수품이다. 그야말로 황제의 집무실에서 소작농의 통나무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사모바르’가 없는 집은 찾기 힘들 정도였다나. 난로 겸 찻주전자 겸 ‘러시아식 차 도구’ 라고 하면 될까. <안나 카레니나>식 첫 문장에 대입하면 “모든 러시아 가정은 제각각의 사모바르를 갖고 있다”쯤 되겠다.

특히 옛 러시아 가정집에는 적어도 2~3개의 사모바르가 있었다고 하는데 크기와 모양에 따라 용도가 달랐다. 크고 장식 없이 단순한 형태의 사모바르는 생활용수를 데우는 용도(즉 보일러 목적)로, 보통 크기(3~5ℓ 정도) 사모바르는 일상적으로 차를 마시기 위해 쓰고,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사모바르는 특별한 날에 꺼내 쓰거나 장식품으로 활용했다.

난로 겸 찻주전자인 사모바르에는 수도꼭지가 달려있어 바로 물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러시아 차 문화를 잘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사실 러시아에서는 오래 전부터 차 문화가 발달했다. 1618년 명나라 사신이 러시아 차르에게 홍차를 선물하면서 러시아에 차가 알려졌다는 게 정설이다. ‘홍차의 나라’쯤으로 여겨지는 영국은 몇 십 년 후인 17세기 중반에서야 네덜란드 무역상에 의해 차를 접한다. 그뿐인가. 미국 잡지 <디 애틀랜틱(The Atlntic)>이 2014년에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연간 차 소비량은 1인당 1.4㎏으로 전 세계 4위였다. (1위는 3.13㎏을 마신다는 튀르키예, 3위는 영국이었다.)

러시아 차 문화는 특유의 화려한 찻주전자인 ‘사모바르’와 레몬 한 조각을 넣어 마시는 ‘러시아 홍차’로 요약된다. 지금도 영국에서는 레몬을 넣어 마시는 홍차를 ‘러시안 티’라고 부르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이 ‘러시안 티’를 즐겨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래봤자 찻주전자지”라고? 러시아정교회 수장인 총대주교의 모자와 신발, 심지어 성경책을 넣는 함까지 금으로 만들고 그 위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했던 러시아인만큼, 사모바르도 한없이 화려한 모습으로 진화했다. 은으로 정교하게 세공한 사모바르는 오히려 소박할 정도다.

화려한 사모바르는 알겠는데, 난로 겸 찻주전자 겸은 무슨 의미냐고? 사모바르 안쪽에는 통이 또 하나 들어있는데 그 통에 장작이나 석탄을 넣어 불을 피웠다. 바깥쪽에는 물을 채워 안쪽 통의 열기가 바깥쪽 물을 데우는 원리다. 바깥쪽 통에는 수도꼭지가 연결되어 있어 물이 끓으면 수도꼭지를 열고 뜨거운 물을 받아 차를 우렸다. 물을 데우고 난로 역할도 해야 하는 만큼 보통은 열전도율이 좋은 구리로 만들어졌다. 물론 요즘은 이런 전통 방식보다는, 전기로 물을 데우는 사모바르가 대부분이다.

러시아 화가가 그린 그림에는 근사한 사모바르를 배경으로 값비싼 디저트를 늘어놓고 차 한잔을 즐기는 귀족 여인이 자주 등장한다.
난로 겸 찻주전자 러시아 가정 필수품 ‘사모바르’
19세기 말부터 사모바르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기념품 반열에 오른다. 이때까지의 사모바르는 대부분 ‘툴라(러시아 중서부 툴라주의 주도.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193㎞ 떨어져 있다. 오늘날 러시아 군수산업의 중심지이며 사모바르는 지금도 ‘툴라 산’을 최고로 친다.)’라는 도시의 사모바르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에 근거해 툴라에 ‘사모바르 박물관’이 세워졌고 사모바르 박물관은 지금도 툴라의 대표적인 ‘관광지 겸 볼거리’다.
갑자기 레몬 한 조각 넣은 ‘러시안 티’에 관심이 가신다고? 홍차 향이 ‘훅~’ 풍기는데 첫 모금은 레몬 풍미로 가득 찬, 아주 재미있는 ‘러시안 티’는 동대문역사공원 인근 러시아 거리에 위치한 러시아 레스토랑 ‘파르투내(Fortune)’에 가면 맛볼 수 있다. ‘백종원 3대 천왕’에도 소개된 맛집이라 하니 맛집 탐방 겸 러시아 문화의 향기를 느껴볼 겸 가볼 만할 수도.

러시아 사람들에게 ‘티’는 커피 같은 ‘음료’가 아니라 우리로 치면 보리차 같은 존재다. 실제 파르투내에서 식사하는 모든 러시아인이 자연스럽게 ‘물’을 달라고 하는 대신 ‘티’를 주문하고 모든 테이블에 찻주전자가 올려져있다. 식사가 아닌 그저 ‘러시안 티’를 즐기러 온 이들은 보통 러시아 전통 케이크인 꿀케이크(메도빅) 등의 디저트를 함께 주문한다. 달달하면서도 부르러운 메도빅은 실수의 산물이다. 19세기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 엘리자베타는 꿀을 싫어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어느 신참 요리사가 꿀을 넣은 케이크를 만들었는데, 그 맛이 부드럽고 훌륭해 황후도 반하게 되었다고.

동대문역사공원역 인근 러시아 거리에 위치한 ‘파르투내’에서 레몬 동동 떠 있는 ‘러시안 티’를 즐길 수 있다. <사진 윤관식 기자>
‘러시안 티’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연간 1인당 차 소비량 전 세계 1위인 튀르키예의 홍차다. 사실 사모바르의 원형은 중앙아시아와 이란 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튀르키예에도 독특한 찻주전자가 있는데 ‘차이단륵’이라 부른다. 차이단륵은 주전자가 2개 붙어있는 모양새다. 아래쪽 주전자에 물을 넣고 위쪽 주전자에는 차를 넣고 물을 아주 조금만 넣은 후 두 주전자를 겹쳐 불에 올린다. 아래쪽 주전자 물이 끓으면서 위쪽 주전자에 들어있는 차도 증기에 쪄지는 상태가 된다. 물이 다 끓으면 아래쪽 주전자의 끓은 물을 위쪽 주전자에 부어 차를 우려내 마시는 것이 ‘튀르키예식’ 차를 마시는 방법이다. 우려낸 차는 투명한 호리병 모양 유리잔인 ‘차이바르닥’에 따른 후 각설탕을 넣고 저어 마신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각설탕을 2~3개 넣어 아주 달게 차를 마신다고.)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바르닥은 튀르키예의 대표적인 기념품으로 꼽힌다.
주전자가 2개 겹쳐진 형태의 튀르키예 찻주전자 ‘차이단륵’.
차 소비량 세계 1위 튀르키예
차 소비량이 전 세계 1위인만큼 차 수입을 꽤 많이 할 것 같지만, 튀르키예는 차 생산량도 엄청난 국가다. 연간 차 생산량 24만t 수준으로 생산량 기준 세계 5위다(1~4위는 중국, 인도, 케냐, 스리랑카).

원래 튀르키예 사람들은 커피를 즐겼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전성기인 16세기 초 커피 산지인 예멘을 점령하면서 튀르키예의 커피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다 1911년 오스만투르크가 몰락하고 예멘이 독립해 나간 후 커피 공급이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자 튀르키예 정부는 대안을 고민한다. 터키는 기후상 커피나무를 재배하기 어렵다. 대신 터키 북동쪽 흑해 연안 리제(Rize) 지역은 차나무를 재배할 수 있는 곳으로 확인됐다. 1930년대부터 튀르키예 정부는 리제의 차나무 재배를 독려하고 ‘커피 대신 차를 마시자’고 권장했다. 그렇게 튀르키예는 ‘전 세계에서 차를 제일 많이 마시는 나라’가 됐다.

튀르키예 홍차는 곁들이는 티푸드도 유명하다. ‘튀르키예의 즐거움’이란 뜻의 튀르키예 전통 젤리 ‘로쿰’, 버터를 적신 얇은 반죽과 각종 견과류를 겹겹이 쌓고 벌꿀 레몬 시럽을 부어 만드는 바삭하고 달달한 터키의 국민간식 ‘바클라바’ 등과 함께 즐긴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에서 시작된 스토리가 ‘사모바르’를 거쳐 ‘러시안 티’를 지나 ‘차이단륵’과 ‘바르닥’이라는 다구를 사용하는 ‘튀르키예 차’까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매혹적인 차 이야기라니. 비록 사모바르는 없지만 홍차에 ‘레몬 한 조각’ 풍덩 빠뜨려 만든 내 맘대로 ‘러시안 티’를 마시며 오늘도 이렇게 혼자 차 삼매경, 이야기 삼매경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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