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아이템 찾기
설 연휴를 앞두고 알고 지내던 A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해 인사를 주고받고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목소리에서 짙은 한숨이 묻어 나왔다. A씨는 탱크로리 기사다. 지난해 말 처음으로 화물연대 파업에 참가했다. 여러 얘기를 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총알받이’ 딱 한 단어였다.
지난해 11월 24일 화물연대는 파업을 시작했다. 안전운임제 연장과 품목 확대가 그들의 요구 사항이었다. 지난해 6월에도 관련 이슈로 한 차례 파업에 들어간 바 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탱크로리 기사들의 참여였다. 화물연대는 파업에 들어가면서 탱크로리 기사들의 참여를 대대적으로 알렸다. 6월 10%였던 (탱크로리) 조합원 비율이 지금은 전국 70%, 수도권 90%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어떤 이는 이를 이렇게 해석했다. 화물연대가 ‘아이템’을 잘 찾았다고.
탱크로리 기사들의 파업 동참은 주유소 기름 품절 대란을 야기한다. 이는 국민 생활과 직결된다. 파업을 국민들의 일상 속으로 끌고 온 셈이다. 그만큼 대중의 관심은 컸다. 국민의 불편함을 무기 삼느냐는 비판도 있지만, 그만큼 이들이 절박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땐 그랬다. 그러나 파업이 끝나고 두 달여가 지난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파업에 참여했던 탱크로리 기사들도 적잖이 실망한 눈치다. 그들마저 “우린 들러리였다”고 하니 말 다했다. 70%였던 전국 탱크로리 기사들의 조합원 가입률은 20% 넘게 빠졌다.
A씨를 비롯해 많은 탱크로리 기사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준법 운행 등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이한 건 그들이 현재 내세우는 요구 사항에 안전운임제 연장이니 품목 확대니 하는 건 없다. 이는 애당초 이들의 요구가 아니었다. A씨는 “시킨 대로 했고, 비싼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탱크로리 기사들을 아이템 삼은 건 비단 화물연대만이 아니다. 여당은 그들을 비롯해 화물연대에 ‘불법’ 프레임을 씌웠다. 혐오 대상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정부가 더 적극적이었다. 노사 법치주의 기조 아래 사상 처음으로 업무개시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이기적 집단으로 몰고 갔다.
놀란 건 화주 쪽이었다.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화주 측 한 관계자는 “대화할 여지를 주긴 해야 할 텐데 너무 ‘강대강’으로 간다. 정부가 저렇게 나가니 오히려 우리가 협상하기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어찌됐건 정부의 이런 전략은 일정 부분 먹혀들었다. 화물연대의 파업 당위성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바닥으로 치닫던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이를 계기로 반등했다. 결국 화물연대는 빈손으로 파업을 철회했다.
재미를 봤기 때문일까. 물들어 온 김에 노 젓듯 정부는 노동개혁을 새해 최우선 정책 과제로 선정했다. 고용노동부는 노조의 ‘깜깜이 회계’를 손보는 작업에 착수했다. 노조의 고용 대물림도 조사 중이다. 노동개혁이라 하지만 사실 지금까지 정부의 움직임을 보면 노조개혁에 가깝다. 여기에 국가정보원은 간첩 혐의를 앞세워 민주노총 본부를 압수수색했다.
쏟아져 나오는 간첩 의혹에 민주노총은 사상 초유의 위기를 겪고 있다. 간첩 의혹은 ‘귀족노조’ ‘불법’ 프레임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사실로 드러날 경우 민주노총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그들의 투쟁은 국민적 공감과 명분을 얻기 어려울 것이고,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노동자 권익을 위한 것으로 비치지 않을 것이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민주노총 압수수색은 대통령의 사주를 받아 국정원이 메가폰을 잡은 한 편의 쇼였다”며 일련의 사태를 정치적 의도로 몰고 간 것도 이를 잘 알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오는 5월 1일 노동절 총궐기와 7월 총파업 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간첩 의혹이 이들의 동력을 갉아먹을 것이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정부가 아이템 잘 잡았다고.
황인호 산업부 기자 inhovator@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北미사일 무슨 돈으로 쏘나했더니…“코인 10억 달러 훔쳐”
- ‘굿 안 하면 남편 영혼 구천 떠돈다’…32억 뜯은 동창생
- 서울 북한산 족두리봉서 40대 남성 숨진 채 발견
- 광주서 로또 1등 70억 잭팟 터졌나… 수동 3명 동일인?
- [기획] ‘청담동 술자리’ 가짜뉴스 논란 더탐사, 하루에 2100만원 벌었다
- 檢 ‘대장동 비리’ 물을 것 방대한데…李 “진술서로 갈음하겠다”
- “제주도 수학여행 따라온 학부모들, 미치겠어요”
- “딴놈 만나?!” 前아내 감금·폭행…연락 218회, 도청까지
- 유동규 “시의회 의장 앉혀 공사설립”…정진상 “촉있네”
- “文정부, 가스요금 인상 8차례 묵살…대선 패배후 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