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안전하게 일할 권리

강주화 2023. 1. 30.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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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화 산업부 차장


그때도 이렇게 추웠을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을 맞아 여러 자료를 보다 20년 전 수습기자 시절 경찰서에서 취재했던 사건이 떠올랐다. 같은 날 오전과 오후에 동일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인부 2명이 연달아 추락사했다. 사고 후에도 추가 조치 없이 공사가 진행됐던 것이다. 지금 보면 중대재해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물었다. 경찰은 “그럴 수도 있다”고 했다. 무덤덤하게. 우리 사회는 압축적 산업화를 거쳤고 이 과정에서 사람의 생명보다 일의 속도를 우선하는 데 익숙했던 것 같다. 1970년 완공된 경부고속도로. 서울 서초구와 부산 금정구까지 416.05㎞를 잇는 대공사였다. 당시 국내 여건으로 보면 16년 걸릴 거라고 했는데 2년5개월 만에 끝냈다. 이 길을 만드는 동안 77명이 목숨을 잃었다. 거의 5㎞마다 한 명이 희생됐다.

그다음에 지은 울산 현대조선소. 현대중공업의 시발이다. 당시 조선소 건설 구호는 ‘더 빨리’였다. 73년 한 해 동안 조선소에서는 1894건의 산업재해 사고가 일어나 34명이 숨졌다. 이듬해에는 7월까지만 1566건의 사고로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 노동자는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최대 40시간까지 잠 한숨 못 자고 일한 적이 있습니다. 정신이 멍한 상태에서 이동하다 떨어져 죽은 사람도 수두룩했습니다.” 초고속 산업화의 짙은 그늘이었다.

정부는 82년에서야 산재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부터 폭발한 민주화운동과 노동조합 설립 붐 속에 산재 발생률은 점차 떨어졌다. 노동자 1만명 중 산재로 생명을 잃은 사람 수를 비율로 표현한 사망만인율을 확인해봤다. 2003년 사망만인율은 2.76명(연간 2923명)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전해인 2021년은 1.07명(연간 2080명)이었다. 아직도 매일 평균 5명 이상이 일터의 사고나 직장에서 얻은 병으로 죽고 있다. 이 숫자엔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김군(당시 19세)도 포함돼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후 산업 현장에서는 안전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한다. 이 법 덕분에 일부 사업장이긴 하지만 현장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경우 노동자는 ‘작업 중지’도 요청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난해 중대산업재해로 숨진 노동자는 644명(611건)이었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제대로 처벌받은 경우는 아직 없다. 그런데도 유력 여권 인사는 “중대재해처벌법은 원래 사전 교육과 예방에 포인트가 맞춰졌다”며 법 완화를 시사했다. 경제단체들도 대표 처벌 면제 등 법 완화를 제안하는 보고서를 냈다. 국민 1인당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1971년 310달러에서 2021년 3만4980달러로 100배 이상 성장했다.

그런데 산재 사고 사망만인율은 수년째 0.4~0.5명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4위, 최하권이다. 생명안전시민넷 공동대표인 작가 김훈은 “(개정 방향으로 논의되는) ‘자율 규제’와 ‘처벌 완화’는 이 법을 사문화하는 방향이다. 야만의 현실에 주저앉는 퇴행”이라고 했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크레인 충돌사고 결과는 법이 완화됐을 때 일어날 상황을 예고한다. 800t급 골리앗 크레인이 다른 크레인과 부딪히면서 노동자 6명이 숨지고 25명이 다쳤다. 법원은 협력업체 대표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원청인 삼성중공업 법인엔 벌금 2000만원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일터로 나간 이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한다. 재해 예방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처벌 기준을 약화시켜선 안 된다. 안전은 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이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의무(헌법 34조 6항)이기 때문이다.

강주화 산업부 차장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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