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지가 달라진 친구와 계속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낼 모레 육십, 독립선언서]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길에 섰습니다. 늘 누군가의 엄마로, 아내로 살아온 삶을 마무리하고, 이제 온전히 '내 자신'을 향한 길을 향해 가보려 합니다. <편집자말>
[이정희 기자]
지난 연말 모처럼 고등학교 동창이 연락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그 친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한참 아이들이 자라던 시절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이리저리 마음 고생, 몸고생을 했었다. 그런 면에서 동병상련으로 서로 의지가 됐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자꾸 비껴나갔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야 비로소 살림하는 재미가 생긴 친구는 자신이 홀로 해낸 김장을 자랑했다. 남편과 오붓하게 지내는 시절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 송년 풍경 |
ⓒ 이정희 |
우린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그러나 둘 만의 극적인 여행이 대단원의 말을 내리는 순간 서늘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 이기주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차분하게 돌아보니 친구의 이야기 속 불편했던 지점이 떠올랐다. 마침 내가 다니던 빵집에서 이른바 '인원 감축'이 있었다. 5년 동안 일하던 젊은 기사가 단박에 해고되던 시점, 안 그래도 '알바'인 나 역시 잘리는 건가 하고 마음이 복잡하던 때, 친구는 요즘 샌드위치 기사를 고용하는 데가 어딨냐고 했다.
몇 개월이나마 한 직장에서 오가며 마주치던 기사가 해고되는 과정에 마음이 쓰이던 상황이었는데, 그것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친구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듯하다. 친구와 나의 다른 삶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흘러가는게 여실히 드러났다.
내게 돌아온 질문들
그나저나 이제 '가정'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온 내가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친구와 계속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내 안에서 올라왔다. 아니 친구만이 아니다. 만나면 자기 남편 얘기, 아이들 얘기만 하는 지인들을 보며 내가 이 만남을 굳이 이어가야 할까? 이런 의문이 들기도 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을 참을 인내심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를 주소서."
라인홀트 니부어의 '평온을 위한 기도' 중 한 구절이다. 예전의 나라면 '관계'란 내가 노력하여 바꿀 수 있는 것이라 정의내렸을 것이다. 실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에게 말했다. 너 아니었으면 우리가 계속 만나기 힘들었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 걸 자부심으로 여겼었다. 다시 그 관계들을 잘 맺어가기 위해 전전긍긍 애를 썼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살면서 '관계'에 대해 노력해야 한다고 배우며 자라왔다.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애써 노력을 해야 그나마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게 건강한 관계일까? 이런 질문을 차마 스스로에게 던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 새해 풍경 |
ⓒ 이정희 |
얼마 전 오랜 친구가 다녀갔다. 바쁜 학교 일정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다고 한다. 지난 번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친구가 달려와줬었고, 그때로부터 거의 반년이 훌쩍 넘었다.
겨우 반 년? 예전에 선배 한 분이 우스갯소리로 '니네 그만 커밍아웃해라' 한 적이 있었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아도 한결같이 붙어다니는 우리 두 사람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장례식장에서 봤다고 해도, 나는 정신이 없었고, 그 와중에도 마음편하게 이야기 나눌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또 반 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친구 역시 이러저러한 삶의 변화로 몸무게가 6kg이나 줄었단다. 그 6kg의 사연과 내 몸무게가 5kg이나 늘어난 시간의 속내를 서로 풀어놓기에 하루는 짧았지만 모처럼 한껏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가는 길에 친구는 올해는 바쁠 것 같다며 겨울방학이나 돼야 시간이 나겠다고 말했다. 그런 친구에게 나는 혹 시간 되면 여름방학 때라도 한 번 보자 했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겨울방학이나 돼야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이 무척 섭섭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무슨 겨울 방학이냐며 그 전에 내가 시간을 내서 친구한테로 달려갔을지도. 그런데 그런 친구의 말이 섭섭하지 않았다. 그 친구가 언제나 학기를 시작하면 아이들과의 시간에 자기 전부를 쏟아붓는 걸 알기에, 그런 시간의 틈에 나를 위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그냥 또 언제라도 시간이 된다면 우리는 만나서 어제 만난 듯 그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테니. 나는 니 편이고, 너는 내 편이 되어.
노력을 하던 시절에 나는 노력한 만큼 관계에 대한 보상을 바랐었다. 그래서, 늘 아쉽고 섭섭하고 그랬다. 늘 사람들이 내 맘같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며 살아보니, 사람들이 얼마나 저마다의 삶에 분주한지, 그리고 저마다의 고민 속에서 살아가는지 보인다. 그래서 외려 분주하고 고달픈 자기 삶의 와중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 와준 이들이 고맙다. 만나서 자기 얘기만 했다지만 그 고등학교 동창도 내 책을 읽다 내 눈이 나빠졌다니 걱정돼서 달려온 것이다. 스스로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았으니, 다음에 만난다면 조금 더 여유롭게 그 친구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온 친구가 레깅스 두 벌을 내밀었다. 지난 1년 독립선언서라며 써왔던 내 글을 읽은 새언니가 힘내라며 보내주셨다고. 툭 떨궈져 나온 내게 많은 이들이 손을 내밀어 줬다. 인생의 한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더니, 인연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단독] "살려주세요" "야 비켜, 탕탕"... 특전사 K가 꺼낸 광주의 기억
- 특히 호의적 상대만 고르는 '윤석열 스타일' 진단
- 전세사기 특별법 만든다지만... 재정투입 없고, 절차 그대로
- 세계 최초 재생에너지 100% 섬, 탄소 제로 넘어 네거티브
- 한국인 원폭희생자 이름을 왜 일본 추도시설에 올리냐고요?
- 남한과 북한에 각각 자수한 어느 유명 시인
- 열무 1단에 1980원, 그냥 지나쳤어야 했다
- 일 자민당, 보궐선거 5곳 중 4곳 승리... '아베 조카' 당선
- 이준석 '양두구육' 부메랑 맞은 국민의힘
- 문재인 전 대통령의 '평산책방', 25일부터 운영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