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해방을 이야기하다, 한국형 SF 넷플릭스 영화 '정이'_요주의여성 #79

박지우 2023. 1. 2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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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팀장, 자유롭게 살아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의 김현주

‘Jung_E’라는 영문 타이틀이 뜨는 순간, 슬쩍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처럼 정겨운 이름을 낯선 나라의 누군가가 읽어내는 상상이 어쩐지 재미있더라고요. 넷플릭스 영화 부문 글로벌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정이〉는 SF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한국적인 정서가 결합한 작품입니다. SF 장르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이들에겐 연상호 감독이 빚어낸 ‘한국형 SF’가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필자에겐 충분히 마음이 가고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어요. 일단 ‘전사’로 분한 김현주 배우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만족스러웠지요. 데뷔 27년 차, 청춘 스타로 사랑받았으며 오랜 시간 TV 드라마를 통해 대중과 호흡한 이 친숙한 배우가 OTT 플랫폼의 SF 신작에서 미래 전사로 등장하다니!

‘연니버스’라 불리는 창작자 연상호의 세계에서 여성 캐릭터는 줄곧 진화해왔습니다. 익숙한 얼굴에서 신선함을 이끌어내는 배우 활용법 또한 흥미롭습니다. 영화 〈염력〉에서 정유미 배우에게 ‘해맑은 악당’이라는 이색적인 모습을 끄집어낸 것처럼 말이죠(〈정이〉에 특별 출연한 엄지원 배우도 비슷한 기운을 풍기지요). 김현주 배우의 변신은 연상호 감독의 전작인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에서 먼저 이뤄졌습니다. 이마에 새겨진 흉터에 삼단봉을 들고 거친 액션을 펼치는 김현주를 보고 우리도 놀랐으나, 어쩌면 배우 본인이 가장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벽을 깨는 경험을 한 김현주는 〈정이〉에서 더 큰 도전에 뛰어들었습니다. 강인한 전사의 외형을 갖추는 것은 물론이고 로봇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도 공을 들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안에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욕구는 늘 있었지만 용기가 적었던 것 같다. 연상호 감독의 실험 정신이 잠자고 있던 나의 도전정신을 깨워줬다.” 100분 남짓한 영화에 ‘윤정이’란 여성이 어떻게 최고의 용병이 됐는지, 어떤 자질과 기상을 지녔으며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자세히 담기란 어려운 일이었겠죠. 캐릭터의 빈틈을 채워주는 건 믿음직한 배우 김현주의 존재감과 연기력입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의 김현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의 강수연

〈정이〉가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연상호 감독의 전작 속 ‘싸우는 엄마들’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좀비 떼를 피해 부른 배를 안고 달리던 〈부산행〉의 엄마(정유미), 총을 들고 두 딸을 지키던 〈반도〉의 엄마(이정현) 말이죠. 그러나 이번의 엄마는 좀 다른 결말을 맞이합니다. 고 강수연 배우가 연기한 정이의 딸 ‘서현’은 엄마의 뇌를 복제해 만든 인공지능 로봇이 가상 전투 미션에서 거듭 실패하는 이유가 ‘엄마로서’ 흔들리는 찰나 때문인 걸 알아챕니다. 엄마는 ‘엄마라서’ 강해지기도 하지만 ‘엄마여서’ 한계를 얻기도 하지요. 그리하여 서현은 로봇 정이의 ‘엄마로서의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정이 팀장, 자유롭게 살아요.” 혹자는 신파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의 딸이자 엄마인 이들은 마음 흔들릴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이 영화가 애틋하게 다가오는 또 한가지 이유는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란 점입니다. 그의 입으로 전하는 “자유롭게 살아요”라는 말은 앞서 길을 열었던 존재가 뒤따르는 이들에게 남기는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선구자로 살면서 그 역시 시대의 제약과 사명감으로 힘들었을 때가 많았겠지요. 〈정이〉를 통해 비로소 마주하게 된 배우 강수연이 더는 세상에 없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입니다(부디 영면하시길).

영화는 인간의 육체, 엄마라는 숙명에서 해방된 로봇 정이가 높은 산에 올라 구름 낀 세상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끝이 납니다. 살면서 우리는 다양한 관계와 역할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가능성을 펼쳐 나갑니다. 부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엄마라는 이유로 그들이 닿을 수 있는 세상이 좁아지지 않길. 영화가 끝나고 다시 한번 화면에 뜬 ‘Jung_E’라는 글자를 보면서, 이 정겨운 이름에 담긴 새로운 의미를 곱씹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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