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괴롭힘 사망’ 유언엔…“사비로 킹크랩 사오라고”

권남영 2023. 1. 27.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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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동생 “인격 모독, 증거 인멸 의혹도…아무도 사과 없었다”
전북 지역농협 직원 '직장 내 괴롭힘' 추정 사망 관련. KBS 보도화면 캡처


전북의 한 지역농협에서 결혼한 지 불과 석 달 된 30대 남성 직원이 간부로부터 지속적인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고 호소하며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과 관련해, 친동생이 직접 형 사망 이후의 이야기를 전했다.

사망한 직원 고(故) 이모씨의 동생 이진씨는 26일 CBS 라디오 ‘정다운의 뉴스톡 530’ 인터뷰에서 “2022년 권모 센터장이 부임하면서 지속적인 괴롭힘이 시작됐고 지난해 9월 27일 1차 자살(시도) 사건이 있었다”며 “(결국 형은) 본인의 근무지였던 농협의 자재 창고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유족에 따르면 2009년 농협에 입사한 이씨는 지난해 1월 간부 권씨가 부임한 이후 권씨 등 상사 2명에게 수없이 모욕적인 말을 들었고,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 9월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결혼을 2주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이후 농협 측은 외부 노무사를 선임해 자체조사를 벌였는데, 심의위원회를 통해 상사 2명은 혐의없음으로 결론났다.

이후 농협 측은 직장 내 괴롭힘 사건 매뉴얼에 따라 피해자 부서를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가해자와 마주치는 상황은 해소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씨는 괴롭힘으로 인한 우울증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고, 결국 지난 12일 자신이 일하던 농협 근처에 차를 세워둔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해 숨졌다.

전북 지역농협 직원 '직장 내 괴롭힘' 추정 사망 관련. KBS 보도화면 캡처


동생 이씨는 형이 당한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인격 모독과 그냥 조롱 등은 기본이고, 상하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찍어 누르는 등 (행위를 했다). 금품 갈취 정황도 있었다”면서 “유언장에 의하면 (형은 상사들에게)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킹크랩을 사오라는 지시도 받았고, 실제로 택시를 타고 직접 가서 사비로 사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 “평소 형이 대장·항문 질환이 있었는데 (상사들이) CCTV로 개인 동선을 파악, 화장실 가는 횟수까지 확인해 면박을 주기도 했다”며 “사생활마저 없었다.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였다”고 토로했다.

유족은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들과 괴롭힘을 방관하고 묵인한 책임자들을 상대로 한 진정서를 노동부와 농협 중앙회 감사실에 제출한 상태다.

전북 지역농협 직원 '직장 내 괴롭힘' 추정 사망 관련. CBS 보도화면 캡처


동생 이씨는 “형은 순진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뭐든지 퍼주려 하고 본인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눠주는 사람이었다”며 “군대에 가선 열심히 하다 다쳐 국가유공자가 됐다. 초중고 땐 레슬링을 해 전국체전에서 메달도 많이 땄다. 대학에선 과 대표까지 하는 등 리더십 있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항상 보였다”고 돌이켰다.

이어 “직장에서도 권 센터장 부임 전까지는 직원들이 집에 와서 같이 놀고 부모님께도 소개해주는 등 재미있게 회사 생활을 했다”면서 “(문제 발생 후 회사 측은) 정식 인사 발령을 낼 수 있음에도 구조적인 지시만 했다. 사망 2주 전부터 가해자들과 어떠한 분리도 되지 않았다. 평소 카톡을 보면 형은 그분들의 이름 세 글자만 봐도 치가 떨리고 온몸이 떨린다고 했다”고 호소했다.

전북 지역농협 직원 '직장 내 괴롭힘' 추정 사망 관련. YTN 보도화면 캡처


유족 측은 조사에 참여한 노무사가 가해자와 지인 사이라면서 증거 인멸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동생 이씨는 “형이 확실한 증거를 위해 본인 업무용 PC에 그들의 행동·말투를 시간·날짜와 함께 세세하게 기록해놓은 일기장이 있었다”며 “노무사를 믿고 다 모두 이야기했는데, 유급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뒤 컴퓨터가 모두 폐기 처분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앞서 농협 측은 이와 관련해 노무사와 가해자의 관계를 모르고 선임했고, 둘 사이가 아주 가깝지는 않아 문제 될 게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해당 노무사도 “조사 과정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제가 속이거나 조작하거나 하진 않았다”고 반박했다.

농협 측은 또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이씨 측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라며 추가 감사나 재발 방지대책 마련 등은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동생 이씨는 “크고작은 직장 내 괴롭힘을 겪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인정되지 않아서 저희 형처럼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면서 “물리적인 폭력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고통이 가장 심하다. 이번 일을 통해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법이 확실하게 개정돼 모든 사람이 피해 보지 않고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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