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과 독일, 인도까지 복원에 나선 유적지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프놈펜에서 버스로 여섯 시간 정도를 달려 캄보디아 서부의 시엠립에 도착했습니다. 이 정도 버스 여행은 이제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약간 졸기도 했다가, 흙먼지가 날리는 도로 주변을 구경도 했다가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시엠립에 들어왔습니다.
시엠립이라는 이름은 익숙하지 않으실 수 있겠지만, 이 도시에 남아있는 유적은 모두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 유적인 앙코르 와트가 시엠립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저로서는, 교과서에서 보던 작품들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앙코르 와트'라는 사원의 이름을 많이 기억하지만, 시엠립 주변에 남아 있는 유적이 앙코르 와트 하나 뿐인 것은 아닙니다. 도성이었던 '앙코르 톰'과 그 안의 '바이욘 사원', 그 외에도 인근 지역에 여러 화려한 사원들이 때로 폐허가 되어, 때로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거대한 유적군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하루 만에 다 보기 어려워,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이틀 이상 시간을 들여 관람할 정도입니다. 사실 앙코르 유적이 캄보디아 역사에서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넓은 유적군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시엠립 시내 |
ⓒ Widerstand |
이들 국가의 구성 민족이 실제로 지금의 캄보디아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사실 애초에 국가 형태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단일한 중앙집권적인 형태보다는 후원-피후원 관계에 기반한 분권적인 체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남아시아사에서는 이런 구조를 불교 탱화에 비유해 '만다라적 정치체제'라고 부릅니다.
▲ 10세기경 착공된 타 케오 사원. |
ⓒ Widerstand |
현재 우리가 시엠립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앙코르 유적군은 바로 이 시기, 크메르 제국이 성립된 9세기 인근부터 오랜 기간 만들어진 유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아주 거대한 도시였겠지만 사람들이 살던 집은 주로 목조로 만들어져 남아있지 않고, 석조로 만들어진 사원이나 도성 정도가 지금까지 남은 것이죠.
▲ 바이욘 사원에 새겨진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 |
ⓒ Widerstand |
크메르 제국은 이후 점차 약화되어 14세기 무렵 서쪽으로 미얀마와 태국, 동쪽으로 베트남의 침입을 받으며 쇠퇴합니다. 이후로는 크메르 제국에 대해 남은 기록조차 아주 희소해서, 14세기 초반까지 크메르 제국을 지배한 자야바르만 9세 이후 약 200년 동안 왕의 이름 하나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입니다.
▲ 나무가 뒤덮은 타 솜 사원. |
ⓒ Widerstand |
결국 이 위기 상황에서 캄보디아는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게 캄보디아는 동방 진출을 서두르고 있던 프랑스를 끌어들이게 되죠. 1863년,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은 캄보디아를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삼는 조약에 자진해서 서명합니다. 곧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 프놈 바켕의 사자상. |
ⓒ Widerstand |
언급했듯 앙코르 와트는 12세기 수르야바르만 2세가 건설한 사원입니다. 하지만 수르야바르만 2세가 사망한 뒤 건설은 중단되었습니다. 앙코르 와트는 사원 치고는 독특하게 동쪽이 아닌 서쪽을 정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부조 역시 시계 방향이 아닌 반시계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죠.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기도 하지만, 사실 힌두 사원 건축을 조금만 알고 있다면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원래 힌두 사원은 동쪽으로 들어와 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하지만, 무덤으로 사용되는 사원은 서쪽으로 들어와 반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합니다. 이곳이 수르야바르만 2세의 무덤으로 건설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 니악 포안 전경. |
ⓒ Widerstand |
크메르 제국이 시엠립을 떠나 프놈펜으로 옮긴 이후에도 앙코르 와트는 방치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7세기까지도 캄보디아의 왕실은 앙코르 와트를 멀리서나마 관리하려고 끊임없이 애썼습니다.
앙코르 와트 뿐만이 아닙니다. 앙코르 유적군의 모든 건물들이 그렇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건물과 조각은 만들어지고, 무너지고, 복원되고, 또 파괴되었습니다. 여러 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정비하고 만들어낸 작품이었죠. 건물 하나하나가 농축된 1천 년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유적군 전체가 몇 세기 동안 살아있는 생물처럼 변화한 것입니다.
그 역사성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19세기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고고학자들이 앙코르 유적군을 발굴,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도 앙코르 유적 곳곳에서는 복원 프로젝트에 참가한 다양한 국가의 국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 일본, 한국, 독일, 인도까지 아주 다양한 국가를요.
▲ 앙코르 와트의 일출. |
ⓒ 김찬호 |
누군가는 캄보디아를 프랑스에 헌납한 국왕이 국가의 멸망과 식민지화를 자처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히 그것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겠죠. 실제로 캄보디아는 그 이후로 한 세대가 넘게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겪어야 했으니까요. 앙코르 유적의 발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구인의 '발견'으로 시작되어, 여전히 그들이 주도하고 있는 발굴과 복원 사업에 불편한 시선을 보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복원해낸 앙코르 유적을 앞에 두고 있자면, 그게 어떤 방식이든 이것을 지켜내고, 복원하고, 연구해낸 것이 옳은 결말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결말이 아닌 과정의 올바름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결말만을 두고 보자면 이것이 방치되고 파괴되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옳은 결말은 아니었겠지요.
어쩌면 제가 외국인이라 할 수 있는 비겁한 변명일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결국, 이 유적들을 지켜냈다면 모든 것을 지켜낸 것이 아닌가 여전히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앙코르 유적이라는 "세계"의 유산을 세계의 시민인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이유이면서, 지난 세대의 세계인들이 만들어낸 성과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도 동시 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군사법원 가보셨나요? 정말 어이 없습니다
- 나경원 주저앉히기 역풍, 결국 안철수가 웃는다?
- 대구 엑스코 청소노동자 추락 후 사망... 산재신고 안됐다
- 장작 패는 도끼에 진흙 묻은 아이들... 이런 유치원 아시나요?
- 아이들 74명이 죽어간 초등학교... 그럼에도 남겨둔 이유
- "만신창이 돼 죽은 아들... 가해자는 책임 면할 시간 벌고 있어"
- 한국인이 좋아하는 후쿠오카에 얽힌 '뒤엉킨 역사'
- 김동연 지사 "난방비 폭탄에 전 정부 탓만 하는 윤석열"
- 윤 대통령, 국민의힘 3·8 전당대회에 "꼭 참석하겠다"
- 교사·교감·교장·교육장, 연이어 '윤석열 훈장'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