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베트남쌀국수는 따로 있다, 한국인들이 먹은 것의 정체 [전명윤의 타인의 식탁]
[전명윤 기자]
▲ 호치민시의 전경 요즘 베트남의 스카이라인 |
ⓒ Hoang Chuong |
오늘날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두 시간쯤 가면 남딘(Nam Dinh)이라는 홍 강 하구의 도시가 나온다. 한때 베트남 북부에서 실크, 면직물 산업으로 명성을 떨치던 이곳은 베트남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농업은 예측이 가능하다. 1년 중 얼마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일과가 일정했다. 이 말은 여유 있는 점심식사가 가능했단 뜻이다. 지금이야 시대극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한국도 광주리에 음식을 바리바리 이고 일터에서 막걸리를 반주 삼아 여유 있는 점심을 즐겼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특히나 노동자의 권리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치던 그 시대의 노동은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들볶았다. 대량 주문이 들어오면 보장된 점심시간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사람들은 농경시대와 달리 급하게 밥을 먹어야 했다. 패스트푸드는 이 시기에 탄생했다.
남딘의 공장과 공사장에는 긴 장대를 메고 국수를 파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꽤 오랜 기간 포의 기원을 찾던 사람들은 남딘 외곽에 있는 반꾸(Van Cu) 마을을 주목한다. 적어도 기록상으로 소고기 쌀국수인 포가 남딘에 등장했을 때, 국수 행상은 모두 반꾸 마을 사람들이었고 지금도 반꾸 마을에는 대를 이어 포만 파는 집이 몇 곳 남아있다.
반꾸 마을 사람들은 장대에 국물과 국수를 걸고 노동자들을 따라다녔다. 공장이 들어서자 마을은 얼마 안 가 도시로 탈바꿈했고, 여기저기에서 공사판이 벌어졌다. 딱히 식당이랄 것도 없던 농촌사회에 갑자기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눈썰미 좋은 마을 사람 중 하나인 꺼우방(Co Huu Vong)은 이 요리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는 가산을 싸 들고 과거 베트남 왕국의 수도였던 하노이로 가서 국수 장사를 시작했다. 남딘에서처럼 장대를 메고 국수를 팔러 다니던 꺼우방의 이동식 국수 노점은 대박이 났다. 그의 아들과 딸도 고향에서 올라왔고 얼마 안 가 가게를 임대했다.
▲ 하노이, 올드쿼터 구역의 낡은 풍경 |
ⓒ Nate Cohen |
식민 지배의 유산들
베트남은 1885년부터 1954년까지 약 70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프랑스의 직접 지배지역은 사이공(오늘날의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 남부에 국한되었지만, 북부 역시 괴뢰정부를 통한 간접통치를 이어갔다.
▲ 베트남 식문화에서 프랑스의 흔적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
ⓒ Taryn Elliott |
반미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 사람들의 창의성을 대표하는 요리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반드시(요즘은 한국의 마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래핑 카우 치즈를 발라야 했다.
▲ 베트남은 습한 땅이라 프랑스와 달리 바게트를 아침, 저녁으로 굽는다. 그렇게 만든 반미 샌 |
ⓒ flo-dahm |
무엇보다 이 글의 주인공인 포의 국물을 만드는 소고기를 베트남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먹기 시작했다는 건 고무할 만한 변화였다.
프렌치 비프스튜는 베트남으로 건너와 수많은 허브와 만나면서 풍부한 향미를 얻었고, 노점의 밥집에서는 보 코(bò kho)라 불리는 소고기 조림과 버솟 뱅(bò sô't vang)이라는 와인소스에 졸인 소고기 요리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포의 남진
원래의 포는 무척 미니멀 한 요리였다. 모든 식재를 장대에 매고 팔았기에 부재료가 많을수록 이동과 휴대에 불편했다. 포의 초기 버전이며 지금도 하노이에서 많이 먹는 포 박(Pho Bac, 포 하노이)의 경우 소고기 뼈로 국물을 내고, 국수에는 웍에 볶은 마늘과 샬럿, 토마토 정도가 들어간다. 하노이 사람들은 우리가 포에 반드시 들어간다고 믿는 필수 허브조차 국물 맛을 버린다고 믿고 있다. 다만 소고기 국물을 내는 과정에서 소고기의 잡내를 없애기 위해 팔각과, 생강, 계피 정도가 허용될 뿐이다.
▲ 베트남 남부의 채소 시장 지금이야 유통이 좋아져서 남북의 차이가 적어졌지만 과거에는 남과 북은 채소부터 그 모든 것이 달랐다. |
ⓒ Hugo Heimendinger |
포는 무척 느린 속도로 남하했다. 이 엄청난 위도 차와 기후대를 자랑하는 나라에서는 내려갈수록 북부 하노이와 모든 식재가 달랐기 때문에 일종의 적응기 내지는 안정기를 거쳐야만 했다.
1950년쯤 베트남 중부 호이안에서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은 포가 등장했다. 고명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이 일대에서 많이 나는 땅콩이 으깨져 국물 위에 올라갔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고추기름이 더해졌다. 은근한 맛이었던 포는 중부에서 조금 매워졌고, 심지어 튀긴 바게트나 중국식 꽈배기 요우티아오를 국물에 찍어 먹기도 했다. 순수한 국물맛을 사랑하던 하노이 사람에게는 사문난적도 이런 사문난적이 없었지만 이미 포는 하노이 사람들의 원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2차 대전의 종식은 많은 구대륙 식민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제 세계의 패권은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제국으로서의 영국, 프랑스는 유명무실해졌다. 시대의 변화를 빨리 알아차린 건 영국이었다. 재빠르게 인도와 같은 거대 식민지와 협상을 통해 독립을 인정하고 빠져나갔(Quit)지만, 독일에 탈탈 털린 프랑스는 아직도 제국의 영화와 식민지의 달콤함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와 북베트남간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고,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 놓지 않으려던 인도차이나를 토해내야 했다. 베트남은 이제 북위 17 도선을 경계로 호치민, 그리고 중국과 소련이 후원하는 사회주의 북베트남과 미국이 뒤를 봐주는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어야 했다.
제네바 협정 이후 약 50만 명의 북부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했고, 포 역시 이들과 함께 남베트남으로 이주했다. 쌀쌀한 겨울이 존재하는 온대의 요리가 사철 더운 열대의 세계에서 재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공의 포, 하노이의 포
한반도와 달리 베트남의 남부와 북부는 교류가 드물었다. 즉 일본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큰 도시가 발생하고 그 도시에서 온갖 지역의 인구가 뒤섞인 한반도와 달리 베트남은 남과 북의 두 거점. 즉 북부 사람은 주로 하노이에, 남부 사람은 주로 사이공에 머물렀다.
다시 말해 북부의 피난민들은 남부에 어떠한 기반도 가지지 못한 채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다. 자산가들이야 금붙이라도 들고 왔겠으나 그들 또한 북부의 부동산을 이고오진 못했고, 이런 저런 이유로 북부에서 살 수 없게 돼 남부로 이주한 난민들은 한마디로 적수공권이었다.
남딘 마을의 사람들이 장대에 국수를 말아 하노이에 정착했듯, 이번에는 북부에서 온 사람들이 장대에 국수를 매고 사이공에 정착할 차례였다.
사이공은 하노이에 비해 식재가 넘쳐났고, 프랑스의 직접 지배를 받은 탓에 정통의 프랑스 요리가 정착해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은 모든 요리에 이런저런 가니시 (Ganish, 고명)를 얹는 게 사이공에서는 상식이었단 말이기도 하다. 더해서 사이공의 무더운 날씨에서는 하노이처럼 은근한 불에 소뼈를 오래 우리는 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노이의 포 행상은 장대의 한쪽 끝에 숯불 화덕을 매달고 그 위에서 계속 국물을 끓여댔지만, 사이공에서 이런 행위는 행상이나 손님이나 더위 먹고 쓰러지는 지름길이었다.
▲ 허브가 가득 든, 남베트남 스타일의 포 |
ⓒ RODNAE |
여기에 남부의 설탕으로 약간의 단맛을 추가했다. 요즘도 하노이에 가면 포 국물이 짜다는 느낌이고, 호치민에 가면 달큰하다는 느낌인데, 이렇게 두 지역의 포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치 북한에서 유래한 평양냉면이 한반도 이남에서 고유의 길을 걷고, 평양에서는 평양의 방향성을 찾았듯. 서울 사람들은 평양냉면에 뭔가 가미하면 죽는 줄 알지만, 정작 평양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이 그리도 기피하는 식초, 겨자를 팍팍 뿌려 먹는 게 정통이 되었듯 말이다.
포, 난민이 만든 요리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전쟁 취재를 위해 사이공을 방문한 외신기자들 사이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시내의 레스토랑에서는 프랑스 식재로 무장한 진짜배기 프랑스 요리와 와인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고,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던 기간 동안 수천 명의 외교관, 구호활동가, 기자들로 인해 사이공의 프랑스 레스토랑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외국인들의 남베트남 미식 기행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막을 내린다. 통일된 베트남은 통일 10년 후 세계에서 15번째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전체 어린이의 25%가 영양실조 상태에 빠진다.
사이공 함락 직전 남베트남 정부의 관료, 미군 협력자는 미군이 제공하는 교통수단을 타고 베트남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고, 그들은 작은 보트 하나를 타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보트 피플은 크게 두시기를 거치며 대 탈출극을 벌였는데, 첫 번째는 사이공 패망 직후, 두 번째는 통일 베트남 정부에 의해 본격적인 반동분자 색출이 발생하면서부터다. 아무튼 대략 100만 명의 베트남 사람들이 바다를 통해 탈출했고 이중 절반가량이 바다에서 죽었다.
베트남에서 탈출한 보트피플이 선호하는 나라는 당연이 서방. 그중에서도 미국과 호주, 프랑스 등지였고, 실제로 현재 이들 세 나라의 베트남 망명자수는 120만 명에 이른다.
특히 미국은 약 100만 명의 베트남 사람을 받아들였다. 1975년 이전 미국에 거주하던 베트남 사람은 고작 1000명 미만이었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이들의 집단화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고르게 난민 배분을 했지만 얼마 안 가 베트남 사람들은 주로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주에 재정착했다.
미군이 제공한 항공편이나 선편으로 온 사람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직이 많았지만, 보트피플들이 몰려오자 정말 다양한 계층의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에서 살게 됐다.
▲ 한그릇 단위로 삶아놓은 베트남 쌀국수 |
ⓒ Quang Nguyen Vinh |
1983년 캘리포니아 산호세에 정착한 빈 응우엔이라는 베트남 난민에 의해 <포호아>(Pho Hoa)라는 식당이 생겼다. 베트남 레스토랑에서 포를 취급하긴 했지만 포만 전면에 내세우고 미국인을 타깃으로 하는 식당은 이 집이 최초였다. 1985년 포호아는 최초의 베트남 프랜차이즈가 된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자유화 전이었지만, 미국 여행을 다녀온 한국인들에게도 미국에 가면 월남 쌀국수가 있다는 말이 퍼졌고,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반드시 먹어야 하는 필수 요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1998년 삼성동에 포호아 한국 분점이 생겼다. 이때만 해도 쌀국수는 강남이나 가야 먹을 수 있는 요리였다. 쌀국수와 함께 월남쌈이란 게 있단 소문이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포호아의 성공 이후로 '포'라는 이름이 들어간 수많은 베트남 요릿집과 프랜차이즈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마치 공식인양 포에 숙주와 양파·고추피클, 호이신 소스를 가득 넣고 먹었다. 고수는 이때만 해도 호불호가 강력했는데, 먹을 줄 아는 사람이 외려 드물었다.
2000년대에 들어오자 한국에 베트남 노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농촌 총각들은 베트남 신부에게 장가 들었다. 이렇게 한국에 베트남 커뮤니티가 거대해지고, 이어서 베트남을 여행한 사람들이 많아지며 현지 쌀국수라는 말이 생겨났다. 안산에 가보니, 혹은 베트남에 가보니 우리가 먹던 쌀국수랑 좀 다르던데? 라고 말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미 미국을 한번 찍고 온 쌀국수는 하노이식과는 완전 달랐고, 사이공 스타일과도 국물의 맑은 정도에 있어 꽤 차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요즘은 쌀국수 건면을 쓰는 집도 점차 사라지고 생면을 쓰면서 현지의 국수 식감에 가까워지고 있고, 국물도 더 이상 맑은 국물에만 집착하지 않으면서 현지의 느낌이 더해지고 있는 추세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렇게나 그들을 괴롭혔던 프랑스 요리의 기법을 자신들의 국민요리 속에 슬며시 옮겨 담았고, 요즘은 가장 호감 가는 국가 1위에 미국을 올려놓았다. 어쩌면 베트남은 그들 모두와 승리했기에, 그 토대 위에 침략자들을 편히 내려다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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