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산 1200미터 위에 학교가 세워진 이유
[이기원 기자]
▲ 태기산 등산로 등산로 입구부터 볼 수 있는 상고대와 눈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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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기산 풍력발전기 파란 가을 하늘 향해 우뚝 선 새하얀 풍력 발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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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돌아 내려가면 다시 오르막길이 나온다. 좌우로 늘어선 겨울꽃 감상하며 사부작사부작 올라가면 알려졌던 태기분교 터가 나온다. 정확한 명칭은 둔내면 봉덕국민학교 태기분교였다. 태기산 일대에 모여 살던 화전민 아이들을 대상으로 1965년부터 1976년까지 운영되었던 태기분교는 해발 1200m 고지대에 세워졌던 '하늘 아래 첫 학교'였다.
▲ 태기분교 터 해발 1200m 고원지대 남아 있는 태기분교 터, 눈 쌓인 겨울 백패킹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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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일대에 흩어져있던 화전민들을 태기산 고원지대로 이주시켰다. 3년간 정부 지원을 약속을 믿고 태기산 일대로 들어온 사람들은 원시림을 벌목하고, 산을 깎아 계단식 밭을 만들며 움막에서 생활했다. 태기산 산등성이에서는 매일매일 무수한 나무가 쓰러졌고, 골짜기에서는 불기둥이 치솟았다. 불탄 자리를 개간해서 계단식 밭을 만들었다. 벌목과 개간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제공한 것은 밀가루가 전부였다.
밭을 일구고 곡식을 심어도 제대로 수확하기 힘들었다. 10월 초부터 서리가 내리는 고원지대 기후가 작물 생육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해방과 분단, 6.25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에서 생계가 막연했던 사람들에게 어린아이라도 일하면 밀가루를 받을 수 있다는 태기산 화전민촌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횡성뿐만 아니라 이웃한 평창과 홍천, 경기도 여주와 용인, 심지어 수원과 인천 등지에서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밀가루 외에 화전민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움집을 짓고 생계를 유지를 위한 노력은 화전민들의 몫이었다. 작물 생육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약초 재배 등의 돌파구를 찾았다. 산길 따라 30km 이상을 내려가야 학교가 있어 아이들을 가르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주려는 노력은 정부도 교육청도 아닌 이명순이란 개인이었다. 태기산 화전민촌 아이들을 모아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던 이명순 선생님이 횡성 교육장을 만나고 강원도지사를 만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해서 국제 구호단체의 지원을 받아 학교 건물을 세울 수 있었다.
해발 1200m에 세워진 '하늘 아래 첫 학교'는 1965년 횡성군 갑천면 봉덕초등학교 태기분실로 문을 열었다가 1973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둔내면 덕성초등학교 태기분교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3년 뒤인 1976년 태기분교는 문을 닫았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부터 태기리 주민들에게 40만 원 이주 지원금을 제안하면서 철거를 추진했다. 1960년대 화전 정리사업의 명목으로 박정희 정부는 태기산 화전민촌을 건설해 강원도 일대 화전민을 모아 정착시켰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가까스로 정착해오던 태기산 화전민촌은 1970년대 급격히 쇠락했다. 화전 금지를 앞세운 정부가 태기산 화전민의 이주를 강력히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 태기산 겨울 풍경 태기산 등산로에서 바라본 겨울 설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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