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 남산에 남은 일제의 잔재들
[김상희 기자]
여행자는 지도와 친해질 수밖에 없다. 서울 여행을 하다 보니 서울 지도를 자주 들여다보곤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심장이다. 우리나라 전역에 사람과 물산을 흐르게 하는 펌프다.
이런 서울의 지리적 중심은 어디일까? 지도에서 서울의 한가운데쯤을 눈어림으로 찾아보면 남산이 짚힌다. 남산이 시내 명동에 붙은 데다가 그 정상의 남산 서울타워가 마치 자신이 기준점이라는 듯이 오른팔을 높게 쳐들고 '기준!'을 외치고 있는 게 아닌가.
▲ 남산 정상의 서울타워 광장에 놓인 서울 중심점 표시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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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왔으면 서울의 중심을 가야지. 수도 서울의 한가운데 우뚝 서서 서울을 모든 방향으로 내려다보는 서울의 핵(核) 남산을 일제 또한 결코 허투루 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남산에 신사(神社)가 세워져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남산에 있었던 신사 네 곳을 차례로 따라가 보았다.
남산의 신사 탐방로 : (명동역)-경성신사 터-노기신사 터-조선신궁 터-남산서울타워-경성호국신사 터
서울시에서 조성해 놓은 경술국치 탐방길 '통감관저 터-조선총독부 터-노기신사 터-경성신사 터-한양공원 비석-조선신궁 터(한양도성유적전시관)(1,7km)'를 참고해 가며 돌아봐도 좋겠다.
서울을 대표하던 신사, 경성신사
경성신사(京城神社) 터로 알려진 숭의여자대학교를 찾아갔다. 평양에 있던 숭의학원이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한 후 1954년 서울에서 학교 부지를 물색하다가 경성신사 부지에 학교를 짓기로 한다.
▲ 경성신사 터 숭의여자대학교 본관. 건물 뒤로 남산 서울타워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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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는 명동 일대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에 의해 1898년에 일본의 시조신인 천조대신을 제신으로 삼는 남산대신궁으로 설립되었다가 1915년 경성신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1925)이 세워지기 전까지 서울을 대표하는 신사로서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제사와 의식을 지내는 최고의 시설이었다.
▲ 숭의여자대학교 본관 앞. 경성신사 주춧돌로 보이는 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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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서 군신으로, 노기신사
경성신사에서 채 몇 분 걷지 않아 노기신사(乃木神社)가 있었다는 리라초등학교 뒤편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에 도착했다. 러일전쟁 당시의 사령관이던 일본인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를 받드는 신사라고 한다. 1952년에 설립되었다는 남산원 옛 건물 세 개동도 서양식이 섞인 일본풍 문화주택이었다.
▲ 신사 참배 시 배전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 곳 테미즈야(손과 입을 씻는 물을 담는 석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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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미즈야의 뒷면. 기증자의 이름과 연도(소화9년,1934년)가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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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원의 남쪽인 남산 자락 옹벽에 신사 유구들이 사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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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도리이와 기초석으로 추정되는 신사 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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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인 노기는 어떻게 신(神)이 되었을까? 러일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장에서 두 아들까지 잃은 전쟁영웅 노기마레스케는 1912년 천황이 죽자 그의 부인과 함께 자결한다. 죽음과 동시에 노기는 군신(軍神)이 되었고 노기를 받드는 신사가 일본 전역에 세워졌다. 노기신사 붐이 경성으로까지 번져 경성신사에 딸린 신사로 현 위치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신사 피라미드의 최고 정점, 조선신궁
조선신궁(朝鮮神宮) 터는 남산의 백범광장에서 한양도성유적전시관에 이르는 넓은 곳이다. 남산자락에서 일명 '삼순이계단(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마지막 장면 촬영지)'을 오르면 신궁의 배전 터로 곧장 갈 수 있지만 소파로를 따라 백범광장으로 오르는 계단길로 가보았다. 그 길이 조선신궁으로 가는 동쪽 참배로였다고 한다.
▲ 조선신궁 전경도 |
ⓒ 조선신궁 배전 터 안내판 |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으로부터 신체(神體)를 받아 신사에 앉히는 행사인 진좌제와 봉축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부산에서 배로 들여온 신체를 최신문물인 기차에 태워 경성역으로 옮긴 후 봉안차로 거리 행진을 하면서 남산까지 이동시켰다고 한다. 경성역을 그 행사에 맞춰 완공했다고 하니 일제가 얼마나 조선신궁에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 조선신궁의 배전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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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신궁 배전 터 뒤 방공호 부근이 본전 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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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호국신사로 오르는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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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호국신사(1943년)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군인들을 호국의 영령으로 추모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신사로서 초혼제와 합사제 등 전사자 추모 행사와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행사가 많이 열렸다고 한다.
▲ 계단 끝에 경성호국신사 터였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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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 일대는 지금도 일본식 가옥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니 신사 하나쯤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이름도 생소한 호국신사라고 한다. 전쟁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을 '호국의 신'으로 모시고 국가 차원의 위령제를 지내는 곳이라? 어디서 들어봄직하지 않은가. 영어권에서 아예 '전쟁 신사(War Shrine)'로 호칭한다는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의 기능을 경성호국신사가 담당한 것이다.
▲ 후암동의 일본식 가옥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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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명실상부한 '서울의 지리 중심' 남산은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의 남쪽 경계였다. 남산은 한양도성의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한양의 수호산으로 엄격히 관리되었다. 북악산 아래 경복궁에서 바라보면 마주 보이는 산으로서 조선을 흥하게 하는 기운을 보내주는 산이라 여겨 남산을 특히 신성시했다고 한다.
▲ 남산의 잠두봉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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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 식민도시 경성, 차별에서 파괴까지(서울역사편찬원, 2020)
-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한일공동기획 침략신사, 야스쿠니(민족문제연구소, 2009)
-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강제병합 100년 특별전 도록, 2010)
- 웹페이지 서울특별시 중구청 junggu.seoul.kr
- 가나가와대학(神奈川大学) 해외신사 데이터베이스 himoji.jp/database/db04
▲ 찾아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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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기신사 터 : (현)남산원, 서울 중구 소파로2길 31(예장동)
- 조선신궁 터 : (현)한양도성유적전시관 옆, 서울 중구 회현동1가 100-267
- 경성호국신사 터 : (현) 용산중학교 뒤 108계단, 서울 용산구 신흥로36길(후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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