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사라진 미술시장, K작가 키워야 살아남는다”
지난해 말 글로벌 미술전문지 ‘아트리뷰’ 선정 ‘파워 100’에 한국인 3명(이현숙·한병철·정도련)이 올랐다. ‘파워 100’은 세계 미술계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명단은 작가에서부터 미술관장, 화랑을 운영하는 갤러리스트, 큐레이터, 철학자·이론가까지 망라한다. 한국인으로 8년 연속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인물은 국제갤러리 이현숙(73) 회장이 유일하다. 아트리뷰는 그에 대해 “국내외 미술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양혜규 등 예술가들의 활약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단색화 명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한국 미술시장은 사상 처음으로 거래총액 1조원을 돌파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해외 갤러리들이 잇따라 서울에 지점을 열었고, 국내 작가들의 해외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K-미술 시대’가 활짝 열렸다. 1982년에 문을 열고 지난 40년간 한국 미술 최전선을 지켜온 이 회장은 지금 미술계를 어떻게 볼까. 그를 만나봤다.
Q : 한국 미술시장이 큰 전환점을 맞았다.
A : “맞다. 전 세계가 이렇게 밀려 들어온 적이 없었다. 요즘엔 그냥 칼끝에 서 있는 것 같다. 바짝 긴장해야 한다.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 한국미술을 키우기 위해선 어느 갤러리 하나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되고, 네댓 개 갤러리가 서로 경쟁하며 같이 움직여야 한다.”
Q : 처음엔 컬렉터였다가 갤러리를 차렸다고.
A : “말 그대로 내가 ‘선무당’이었다. 아이 셋을 키우며 살림하다가 화랑을 열었다. 젊을 땐 그림 사는 게 그렇게 좋았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직접 팔아보고 싶어져 남편 몰래 화랑을 차렸다. 당시 모 일간지 미술 기자가 ‘저 유한마담이 몇 개월이나 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는데 여기까지 왔다.”
Q : 40년간 성장해온 비결이 뭘까.
A : “무엇보다 이 일을 하는 게 굉장히 즐거웠다. 이게 다른 장사와는 다르다. 작가를 몇 년간 지원하고, 시간이 걸려 그 작가가 큰 미술관에서 전시하게 됐을 때 느끼는 보람이 크다. 초기에 젊은 작가로 만난 이기봉(65), 홍승혜(63)작가가 지금은 중견이다. 칸디다 회퍼(78), 아니쉬 카푸어(68), 빌 비올라(72) 등 세계적인 작가들도 오랫동안 함께 해왔다.”
그는 “작품을 팔기 위해선 작가도, 고객도 잘 골라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며 “갤러리가 작가를 키우려면 작품을 아무한테나 팔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Q : 고객을 고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 :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안 된다.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 같은 거장도 생전에 작품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작가의 성장을 응원하며 기다려줘야 한다.”
Q : 과거엔 국내서 ‘그림 수집=탈세’로 통했다.
A : “그것도 오래된 이야기다. 우리는 초기부터 외국 작가들 작품을 많이 다뤘기 때문에 자료 없이 거래할 수가 없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아들이 현지 회계법인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일찍 투명한 거래 시스템을 갖췄다. 그 과정은 힘들었다. 고객들은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구느냐고 했고, 작가들도 세금 내게 해서 힘들다고 했다. 그렇게 일해온 지 25년째다.”
Q : 요즘엔 해외 갤러리가 한국 작가 발굴에도 나서고 있다.
A : “한국 미술계가 살아남으려면 정말로 긴장해야 하는 이유다. 내 목표도 더 확고해졌다. 전에 우리가 외국 작가를 국내에 소개했다면 이젠 한국 작가를 키워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국내 갤러리라고 하더라도 작가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면 작가가 붙어 있지도 않다. 미술시장에 국경이 없어지고 있다.”
Q : ‘K미술 시대’를 위해 작가들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A : “국내 작가 아카이브가 아직도 너무 약하다. 단색화를 해외에 소개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아카이브였다. 박서보 화백만 준비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한 모든 기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드로잉도 중요하다. 작가가 크면 그게 다 초기 작품이다. 젊은 작가들은 지금 작품이 팔리지 않더라도 열심히 그리고 쌓아 놓아야 한다.”
Q : 젊은 컬렉터들이 늘고 있다. 초보 컬렉터에게 조언한다면.
A : “그림은 반드시 남아 있는 돈으로 사고 즐거움을 위해 사라. 돈 주고 사서 걸어놨으면 즐거워야 하지 않겠나. 절대 빚내서 사면 안 된다. ‘저게 돈이다’하고 보면 고통만 된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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