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 건축물 ④ 건축가 김수근이 지은 작은 집, 이음1977

이경진 2023. 1. 2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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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인천항이 보이는 언덕 위, 건축가 김수근의 철학을 응집시킨 작은 벽돌 주택.
「 이음 1997 」
천창으로 떨어지는 빛으로 더욱 안온해진 집. 천창은 주택 내부에 2군데 있다.
기왓장을 닮은 먹색 전돌로 두른 외벽, 파벽돌을 활용한 노출 콘크리트 내벽과 아치형 실내 구조까지. 김수근 건축의 작은 집합체 같은 주택과 마주하면 각 터마다 성격을 반영하며 공간미학을 고민했던 건축가가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음1977은 인천 송학동 응봉산 자락이 품은 언덕 위의 집이다.
침실과 드레스 룸이 있는 2층에서 내려다본 모습. 처음 의뢰를 받아 제작된 도면은 상부 층과 지하 층 구분이 이보다 더 확실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산자락의 경사 지형을 잘 활용했다. 거실의 큰 창은 인천항을 향해 가는 뱃머리처럼 바다를 향한다. 옥상에서 이어지는 집의 뒷골목에선 초록의 공원으로 향하는 높은 계단을 곧장 오를 수 있다. 정면을 인천항을 향해 정박시킨 채 얕은 경사를 따라 굽이굽이 오르는 건물의 모양새는 얼핏 김수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울경동교회를 연상시킨다.

굽어진 실내 계단을 오르면 2층에 세 개의 방이 펼쳐진다. 각 방을 잇는 통로 역시 아치형 구조다.

김수근은 북촌에서 나고 자랐다. 이 집에는 터가 가진 장소적 성격을 반영해, 좁은 골목길의 공간 미학이 담긴 주택을 여럿 선보였던 그의 농익은 철학이 엿보인다. 국립부여박물관, 세운상가, 공간 사옥, 문예회관, 서울종합운동장, 올림픽공원 등 한국 근현대사를 빼곡히 메운 김수근의 건축. 그는 총 70여 개의 주택을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지금은 보기 힘든 실외 조명과 창살, 스위치도 대부분 보존돼 있다.

주택은 1977년에 완공됐다. 건축주는 전 영진공사 회장인 이기상과 부인 공경화. 1971년 공간사옥 등 김수근의 건축물에 매료된 이기상은 막역하게 어울리던 김수근의 동생 김수만을 통해 주택 설계를 의뢰했고, 1976년에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대지에 있던 작은 집을 철거하고 새 주택을 건축하면서도 이미 있던 수목은 그대로 살렸다. 외벽에는 문화재 보수용 회색 전돌을 생산하는 김영란 장인의 전돌을, 집 안쪽 벽은 일제강점기에 정미소였던 고려정미소 건물을 헐 때 나온 붉은 파벽돌로 쌓았다.

지금은 보기 힘든 실외 조명과 창살, 스위치도 대부분 보존돼 있다.

실내에 사용된 전등 등의 소품은 일본에서 김수근이 직접 구입해 왔다고 하니, 건축주 못지않게 건축가 역시 집의 디테일에 굉장히 공들인 것 같다. 이기상과 공경화의 가족은 거실 대신 입구 계단을 소통 공간으로 활용했다. 마치 작은 골목길처럼 서로 만나고 이어지는 실내 공간 구성과 아치 구조 등 김수근의 상징과 같은 심미적 요소는 건축주의 즐거움이자 자부심이었다. 지난 2020년 공경화 여사가 혼자 살던 집을 인천도시공사가 매입한 후, 유지와 보수를 위한 공사를 거쳐 ‘이음1977’이라는 이름의 문화자산으로 시민들에게 개방한 이곳은 인천도시공사의 근대건축문화자산 재생사업 1호다.

지금은 보기 힘든 실외 조명과 창살, 스위치도 대부분 보존돼 있다.

인천도시공사는 문화적 도시재생을 추진하면서 송학동 주택과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적·인문적 자료 조사, 수집, 정리를 통해 아카이브 작업에 공을 들였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자료를 발굴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옛 자료들을 주택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모두 송학동 개항장 일대의 지난 시간을 생생하게 소환한다.

지하에서 1층 마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에도 외벽용 먹색 전돌을 그대로 적용했다.

인천광역시 교육청화도 진 도서관이 보유 중인 자료에선 대지에 자리하던 ‘헨켈 저택’의 1960년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헨켈 저택’은 1895년경에 건축됐다. 세창양행 간부 사원인 헤르만 헨켈이 거주했던 집으로, 역시 벽돌의 질감을 잘 살린 단층 건물이었다. 그 시절에도 인천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으로 유명했다. 1층 거실에선 넓게 바다가 보이는 창과 ‘ㄱ’ 자로 꺾인 코너 창이 보인다. 2층에서는 안방에서 인천항을 팔각 돌출 창으로 볼 수 있다. 인천항의 모습이 이 방, 저 방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집이다. 심지어 옥상에서는 인천항 전체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자연 채광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창을 냈다.

이음1977은 1970년대 공간건축의 한 획이 된 내외부 토털 건축 디자인의 상징적인 건물 중 하나다. 부인 공경화에게 “내가 떠나도, 이 집은 반드시 지켜 달라”고 당부한 이기상의 뜻은 이음1977로 이어져 이 집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 마당의 절구에 앉아 물을 먹는 새와 친환경 캐츠 타워 역할을 하는 주목나무를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고양이들과 함께.

목재 창호와 직접 제작한 틈새 방충망까지 옛모습 그대로다.

이음1977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와도 이웃이다. 집의 옥상과 이어지는 뒷골목을 따라 걸으면 키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우람한 수 천 개의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와 만날 수 있다. 작은 주택의 이야기가 이 지역의 보호수가 된 고령의 플라타너스와 함께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지금과 같이 아주 오래 정박할 수 있기를.

김수근이 일본에 직접 가서 구매한 펜던트 조명.
창은 각자의 자리에서 빛과 바람의 농도를 적절히 조절해 준다.
인천항을 마주보는 주택의 전면부.
옥상에서는 인천항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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