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인사이트] 현대 중국이 잊은 명대 가구 철학 “겸허해야 고귀하다”

2023. 1. 25.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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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가구에 깃든 중국의 품격


한인희 건국대 중국연구원 상임고문
지난해 10월 8일 소더비 홍콩 가을 경매에서 홍콩의 명문가 후손이자 유명한 소장가인 조셉 호텅(何鴻卿)의 소장품 경매가 있었다. 이 경매에서 명나라 말기의 교의(交椅, 접이식 의자)인 ‘황화리원후배교의(黃花梨圓後背交椅)’가 눈길을 끌었다. 최종 낙찰가격은 1억2460만9000홍콩달러(약 198억5800만원). 중국 좌구(坐具) 경매 역사상 최고가의 기록을 세웠다.

명나라 말기 ‘교의’ 200억원에 낙찰

중국 명대 고가구값이 고가라는 점을 주장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왜 한·중·일 3국 가운데 중국만이 의자와 같이 높게 앉을 수 있는 가구들을 사용했을까가 궁금하다. 역사적으로 한·중·일 문화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주거방식이다. 한국은 주로 ‘구들’, 일본은 ‘다다미’ 바닥에 앉아서 생활했다. 중국도 고대에는 ‘바닥에 꿇어 앉는(跪坐)’ 주거방식이었다. 이처럼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 방식을 ‘석지이좌(席地而坐)’라 하며 여기엔 예치와 계급사회의 전통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 중국에서 사용하는 ‘주석(主席)’이라는 용어도 이러한 역사적 전통에서 비롯됐다. 즉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는 인사를 가리켰다.

이러한 ‘석지이좌’ 습속은 상나라와 주나라 시기부터 위진남북조까지 약 1700여년간 이어졌다. 그렇다고 생활 속에 가구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이 시기 가구에 다리가 높은 탁자나 의자가 없었을 뿐이다. 중국인이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다가 의자나 침대 위로 올라간 것은 생활상의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화의 핵심은 불교와 호족의 영향이었다. 불교가 전래하자 다리를 내리고 앉을 수 있는 좌구인 접이식 의자 호상(胡床)이 중국에 들어왔다. 특히 위진남북조 시기는 한족과 이민족 간의 대융합 시기였다.

황화리원후배교의(黃花梨圓後背交 椅), 강향단나무로 만든 둥근 등받이 접이식 의자. [사진 한인희]

이로 인한 다양한 변화가 한족과 한족 정권에 나타났다. 단순한 변화를 넘어 사유방식, 행위특성, 생산방식, 풍속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른바 ‘호화(胡化)’가 이뤄졌다. 호인들의 ‘다리를 내리고 의자에 앉는’ 이른바 수각이좌(垂脚而坐) 생활방식이 점차 유행하게 된 것이다.

불교의 전래는 가구의 제작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구 디자인에서 불교 건축양식인 곤문(壼門) 장식이 크게 유행했다. 명·청 시기 가구에 나타나는 말발굽형(馬蹄型)의 다리 선각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이렇게 해 수미좌(須彌座) 조형 역시 명식 가구의 핵심적 디자인이 됐다. 탁자의 면과 다리 사이에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것과 같은 형태의 속요형(束腰型) 가구의 탄생이 바로 그것이다.

간결·소박한 문인 정신 반영

명식(明式) 가구란 명대 및 청대 전기 강희·옹정·건륭 시기까지 제작된 가구들을 지칭한다. 이 시기 가구는 중국 전통 가구의 황금시대였다. 그렇다면 특별히 명대에 가구 문화가 발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명대 사회의 안정, 경제적 부유, 문화적 번영에 기인한다. 생활에서 담박하고 고상한 문화적 내함을 주요한 가치로 생각한 이어(李漁)·문진형(文震亨) 등 많은 문인 지사들이 직접 가구 설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들 관료 지식인들은 명대 가구의 특징인 간결하고 소박한 가구 제작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중국 명식 가구는 쑤저우(蘇州)의 것을 최고로 친다. 청 도광(道光) 시기 발행된 ‘소주부지(蘇州府誌)’ 기록을 보면 “오중(吳中)의 인재가 우수하기는 실로 천하 최고다. 백공(百工)의 기예 가운데 기교에서 보면 이들을 절대로 따라오지 못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중이 바로 쑤저우 지역이다.

황화리남관모의(黃花梨南官帽 椅), 강향단나무로 만든 남방 지역 관모 형태 의자. [사진 한인희]

중국 고가구 분야 최고 명저인 『명식 가구 연구』를 집필한 왕세양(王世襄)은 명식 가구에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 즉 목재미·조형미·구조미·조각미·장식미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목재의 아름다움을 으뜸으로 쳤다. 그만큼 명식 가구는 어떠한 목재를 사용했는가가 핵심이다. 명식 가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우선 목재 자체의 재질, 무늬, 빛깔과 광택의 아름다움을 깊이 고려해 가구 자체에 조각이나 장식을 최소화했다. 이들 가구는 동남아 등지에서 수입한 황화리(黃花梨)·자단(紫檀) 등 재질이 우수한 경목(硬木)으로 제작됐다.

접이식 의자 ‘교의’는 중국 전통 가구 중 하나로 송나라 그림에도 등장한다. [사진 바이두]

둘째, 조형적으로 간결함을 강조한다. ‘재료를 적게 사용하고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을 견지했다. 장인들은 불필요한 부분은 최소화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남겨야만 완벽하며 완전하다고 판단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이미 ‘저탄소’ 가치를 실천한 셈이다.

셋째, 구조 분야에서 정밀한 맞춤을 중시했다. 짜 맞춤하는 장부의 구조가 핵심으로, 전통적인 짜 맞춤 방식인 순묘(榫卯, 숫장부와 암장부) 기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장부의 교합, 철제 못을 사용하지 않은 점,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았다.

넷째, 장식에서도 직선과 곡선 배치의 조화를 강조한다. 사각 안에 원이 있고, 원 가운데 사각이 있으며, 장단과 굵기 등 방향적인 측면에서도 대비를 강조했다. 이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숫장부와 암장부, 선과 면, 사각과 원은 중용과 함축의 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명품은 단순할수록 값도 높아져

지난해 10월 소더비 홍콩 가을 경매에서 명나라 말기 접의식 의자 ‘황화리원후배교의’가 약 198억 5800만원에 최종 낙찰돼 중국 좌구(坐具)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 텅쉰왕 캡처]

다섯째, 조각은 간결하고 여백을 처리할 필요가 있는 경우로 최소화했다. 이러한 예술 풍격은 명식 가구 아름다움의 정수이며, 당시 문인들에게 존재했던 기개이기도 했다. 이는 당시 문인들이 이름을 떨치고 출세하는 것보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내적인 침잠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완전한 조화, 심경과 만물이 일체를 이루도록 했다.

결국 명식 가구가 추구하고자 했던 철학은 번잡한 장식이나 불필요한 가공을 하지 않고 간결함을 강조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으로, 고상하고 우아하면서도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을 추구했다. 이렇게 볼 때 명식 가구는 서양의 가구가 추구한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박하면서 고아하고 간결한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명품은 단순할수록 고가이며, 최고 예술의 경지는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 숨겨질수록 더 고귀하다.

이러한 전통에도 현재의 중국은 대외적으로 거칠고 투박한 행태를 자주 보인다. 자신들의 선조들이 보여준 겸허하고 안으로 깊이 침잠하는 명식 가구의 미적 가치에서 교훈을 얻을 수는 없을까.

■ 최고 권력의 상징인 명나라 교의(접이식 의자)

「 현재 남아 있는 명대 고가구 진품은 약 1만여 점으로 추정한다. 자금성에 소장된 고가구가 7000여 점에 달하는데, 이중 명대 고가구는 겨우 300여 점에 불과하다. 물론 중국 내의 각 박물관과 소장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명식 가구들을 보유하려는 붐이 일고 있다.

해외 여러 박물관에서도 중국 명식 가구를 경쟁적으로 소장하고 있다. 특히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 등 대형 박물관에서 특별하게 소장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중국고전가구박물관이 명대 명품 고가구 1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명대 가구 소장가로 우선 미국인 로버트 엘스워스를 꼽을 수 있다. ‘명대의 왕’이란 별칭이 있는 그는 중국 고대예술품의 최고 수장가다. 미 캘리포니아 중국고전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커티스 에바르트는 자신이 수집한 명대 가구로 상하이에 ‘산쥐(善居)’라는 고전가구점을 오픈했다. 필리핀의 비라타는 1960년대부터 명대 가구를 수집한 컬렉터로 유명하고, 영국인 소장가 휴고 모스는 다양한 명식 가구 소장자다.

명나라 말기에 제작된 교의가 고가로 평가되는 이유는 왜일까. 진품 교의는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었다. 오직 최고 권력자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다. 중국에서 소위 ‘첫 번째 교의에 앉다’라고 하면 수령이 됐다는 뜻이다.

이러한 교의는 황제가 나들이하거나 하면 쉽게 접을 수가 있어 휴대하기 편하다. 그러나 하중을 잘 견딜 수 있어야 했기에 보존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10여 개 정도만 남아 있다고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명대 가구에 사용된 핵심적인 목재는 황화리(黃花梨)다. 청대에 자단(紫檀)이 주목을 받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청대는 좋은 황화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자단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도 황화리와 자단을 발견하면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규정했던 귀한 목재다. 지금도 중국에서 황화리와 자단은 수출금지 품목이다.

황화리는 컬러가 담황색으로 은은하며 목질이 안정적이다. 추위나 더위에 변형되지 않고 갈라지지도 않으며 쉽게 굽어지지도 않는다. 목질이 치밀해 장식이 선명하며 고아한 인상을 줘 명대 지식인의 큰 사랑을 받았다.

한인희 건국대 중국연구원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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