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돈 받고 서러워한 딸, 해줄 말이 없었다

이지애 2023. 1. 2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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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빌런'에게 대신 전합니다] 남아선호사상 배경으로 한 MBC 드라마 <아들과 딸>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느 때보다 이른 설 명절이 반갑기만 하면 좋으련만 생각만 해도 가슴 한 편이 답답해지는 이들도 있죠. 남편 뒷바라지만 강요하는 시어머니, 걱정인지 염장인지 모를 말만 늘어놓는 친척들, 설 연휴에도 일하라는 사장님, 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추억의 빌런'까지. 그들이 보고 무언가 깨달을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 노래를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이지애 기자]

온 가족이 모이는 설이 코 앞이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적조했던 삼촌, 사촌들까지 옹기종기 모일 생각을 하니 벌써 훈훈함이 집안에 가득한 것 같다. 올해는 주머니 사정이 빠듯해 조카들 세배 돈을 얼마나 줘야 할지 고민되지만 아이들의 기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나이와 학년을 고려해 서운하지 않게 공평히 잘 배정해야 한다.

한 번은 우리 집 작은 딸이 세뱃돈을 받고 서러워 운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하던 해였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께 받은 세뱃돈이 제 오빠 고등학교 입학하던 해 받았던 액수보다 퍽 적었기 때문이다. 당장 별다른 내색은 안 했지만, 딸은 집에 돌아와 '왜 매번 오빠가 더 많이 받는 거냐'며 분개했다. 손자를 더 아끼시는 부모님의 속마음이 종종 설 같은 명절에 그렇게 드러나곤 한다. 서러워하는 딸을 달랠 말이 변변치 않아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지금이야 퇴색되어 가지만 74년생인 나 어릴 적만 해도 남아선호 풍토는 노골적이었고 비일비재했다. 1남 5녀를 둔 내 할머니는 맏이인 아버지만 대학까지 진학시켰고 밑의 고모들은 일찌감치 타지의 공장이나 미용실 등에 나가 돈을 벌게 했다. 그리고 내가 첫 딸로 태어나자 "딸 많은 집에 와 또 딸이냐?"며 엄마를 질타했고, 근심 쌓인 엄마는 부랴부랴 근처 절의 노스님을 찾아가 남동생을 볼 수 있다는 내 이름을 지어왔다고 한다.

딸이라는 이유로 근심이 된 아이
 
 MBC 드라마 <아들과 딸> 한 장면.
ⓒ MBC
 
태어나자마자 딸이라는 이유로 온 가족의 실망과 근심이 된 아기와 그 엄마는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었던 걸까? 당시 이런 상황은 비단 우리 집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딸들의 설움 많은 삶에 시대적 공감이 쌓였던지 그런 시대상을 잘 담아낸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1992년 10월부터 1993년 5월까지 64부작으로 제작되어 평균 시청률이 49%가 넘었다는 MBC <아들과 딸>이다.

이름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물씬 퍼져 나오는 이 드라마는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남아선호사상 짙은 가정에서 이란성쌍둥이로 태어난 귀남(최수종 분)과 후남(김희애 분), 두 주인공이 겪는 가족 간의 갈등과 화해를 통해 가족과 혈연의 의미를 짚어보는 내용이었다.

귀남을 극도로 편애하는 엄마(정혜선 분)의 남아선호사상이 하도 짙어서 보고 있으면 고구마 백개는 먹은 듯 하지만 여러 등장인물이 화제였기도 했다. 특히 "홍도야 우지 마라~ 아, 글씨 이 오빠가 있다!"를 손뼉 박자를 맞추며 맛깔나게 불러댄 백구두 시골신사 아버지 만복(백일섭 분)과 애교 많으면서도 철부지인 막내 종말(곽진영 분)의 인기가 높았다. 
 
 MBC 드라마 <아들과 딸> 한 장면.
ⓒ MBC
 
이 드라마의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7대 독자로 태어난 귀남은 태어난 순간부터 엄마의 주체할 길 없는 애정에 감싸여 귀하디 귀하게 자란다. 그에 반해 후남은 걸핏하면 '쓸데없는 계집애'라 불리며 갖은 구박을 당한다. 여자애가 무슨 공부냐며 중학교 월사금을 구해 주지 않고, 같은 생일날인데도 귀남만 생일상을 차려준다.
후남은 그래도 꿋꿋하게 장학금을 받아 고등학교를 마쳤고 반대하는 엄마 몰래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까지 한다. 하지만 정작 귀남이가 시험에 떨어지자 엄마는 '옛부터 한 집에 두 명이 급제하는 법은 없다'며 후남을 뭇매질한다. 서러워 도망치듯 집을 나온 후남은 서울에서 공장과 함바집 일을 하며 자립하려 애를 쓴다. 그렇다고 이 드라마가 단순히 남아선호사상 피해자로서 후남만을 부각한 것은 아니다.
 
 MBC 드라마 <아들과 딸> 한 장면.
ⓒ MBC
 
엄마의 온갖 특혜 속에 살아온 아들 귀남 역시 피해자였다. 엄마의 치마폭에 싸여 자란 탓에 심성이 여리고 우유부단한 귀남은 부모의 전폭적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에 늘 시달린다. 수의학공부를 하겠다고 부모에게 말도 못 하고, 후남의 펜팔 친구 미현(채시라 분)을 좋아하면서도 결단력이 없으며, 사법시험공부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한다. 귀남은 귀남대로 처지가 안쓰럽다.

다행인 건 귀남이 딸을 낳고 가정을 일구면서 이 가족에게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불어온다. 귀남이 엄마에게 드디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가 평생 자신만 챙겨주는 게 늘 후남에게 미안했고 불편했다며 목소리를 높인 것이다. 그런 귀남의 태도가 엄마는 영 서운하지만, 오랫동안 떨떠름했던 후남과 귀남의 관계는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한다.

시청자의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건 역시 후남이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이다. 후남과 미현의 우정을 통해 여자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면도 의미 있었다. 끝까지 안타까운 인물은 엄마다. 귀남 처(오연수 분)가 둘째까지 딸을 낳자 또 본색을 드러내며 며느리를 서운하게 한다. 사람은 역시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 답답해진다. 

그토록 뿌리 깊었던 남아선호 풍토가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퇴색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아마도 후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겪은 상처를 그대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고자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후남처럼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내었을 테고, 귀남처럼 악습의 부당함을 바로잡으려는 용기를 낸 결과였을 듯하다. 

우리나라는 2025년이면 전체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 노인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노인 빈곤율이 높아지고 생산가능 인구가 감소하여 경기침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2020년 기준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0.84이다(출처 : 2020년 인구동향조사-출생 사망·통계, 통계청). 거의 국가 소멸을 걱정해야 할 때이다. 이런 상황에 남아고 여아고 성별을 따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태어나는 아이 한 명, 한 명이 모두 귀하디 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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