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교섭' 진짜 뒷이야기…아랍 군벌도 움직이는 피랍 협상가

박현주 2023. 1. 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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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 사건에서 납치 세력이 가장 원하는 건 '정부'를 끌어들이는 겁니다. 인질 석방을 대가로 뭐든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2007년 7월 샘물교회 피랍 사건 당시 아프가니스탄 현지에 파견됐고 현직 시절 수차례 피랍 사건을 담당했던 이기철 전 재외동포영사대사(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사무총장)는 중앙일보 통화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샘물교회 피랍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영화 '교섭'이 18일 개봉하면서 정부의 피랍 사건 대응 원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 피랍 사건을 담당했던 전·현직 외교관들은 "제1 원칙은 정부가 테러 단체와 직접 협상하지 않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18일 개봉한 영화 '교섭'은 2007년 7월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샘물교회 피랍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사진은 각각 외교관과 국정원 직원 역할을 한 배우 황정민과 현빈.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공개·직접 협상은 잘못된 신호"


이 대사는 "샘물교회 사건에서 아쉬운 점은 탈레반과 직접 협상을 비밀리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했던 것"이라며 "21명 피랍자의 목숨은 다행히 구할 수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납치 세력에 잘못된 신호를 줘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또 "막상 피랍 사건이 터지면 정부 관계자들도 여러 이유를 들어 '이번만은 직접 협상 불가 원칙을 우회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끼곤 한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를 여행하는 불특정 다수의 다른 한국인들이 테러 단체의 '주요 타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설명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샘물교회 피랍 사건 당시 알자지라 방송 캡처. 중앙DB.


외교부가 피랍 사건 발생 시 피랍자 가족을 제일 먼저 면담하고 출입기자단의 동의를 구해 석방·구출 전까지 엠바고(보도 유예)를 거는 것도 이 같은 배경이다. 피랍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게 되면 자칫 정부가 납치 세력의 여론전에 끌려 다니게 될 수 있다.

이 대사는 "피랍자 가족을 연결 고리 삼아 정부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는 납치 세력의 수법을 차단하기 위해선 가족과 언론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2007년 7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장 세력 탈레반에 의해 납치됐던 피랍자들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한 모습. 중앙DB.


같은 맥락에서 한국 선박이 해적에 납치된 경우에도 "선사가 협상을 주도한다"는 원칙이 있다. 2006년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발생한 동원호 피랍 사건 때 석방 협상을 지원했던 조희용 전 주캐나다대사는 최근 자신의 저서 '해적 협상 노트 2006'에서 "해적과 몸값 협상은 선주가 직접 하도록 하고, 정부는 과거 해적과 협상해본 경험 있는 전문가를 협상에 관여하도록 하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측면 지원했다"고 회고했다.

조 전 대사는 중앙일보 통화에서 "정부가 끝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되 사실상 모든 협상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옮겼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피랍됐던 선원 25명은 납치된 지 117일 만에 전원이 안전하게 석방됐다.

2021년 1월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에 의해 피랍됐던 한국 유조선 한국케미호. CCTV 화면 오른쪽에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 고속정으로 추정되는 선박이 접근하는 모습이 보인다. 선사 디엠쉽핑 제공.


우방국 도움도 '결정적'


피랍 사건 해결을 위해선 우방국과의 공조도 중요하다. 2011년 아덴만 여명 작전처럼 한국 특수부대가 투입돼 해적을 사살·생포하고 인질 전원 구출하는 영화 같은 사례도 있지만, 대다수 피랍 사건의 경우 관계기관 직원들이 밤낮없이 매달려 주변국의 도움을 구하고 외교적 해법을 고심한 끝에 해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8년 7월 리비아 무장 괴한에 의해 납치됐던 60대 남성이 몸값 지불 없이 315일 만에 석방된 데는 "리비아 동부 군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아랍에미리트(UAE)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당시 외교 당국은 밝혔다. 가장 최근 한국인 피랍 사례인 지난해 11월 기니만 인근 유류운반선 피랍 때도 코트디부아르, 가나, 나이지리아 등 인근국이 정보 수집과 수색에 협조했고 선박이 풀려난 뒤 출항지로 돌아올 때도 이탈리아 해군의 호위를 받았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한 해 3~4건 꾸준히 발생"


정강 외교부 해외안전관리기획관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비공개로 무사히 해결되는 경우까지 포함해 최근에는 한 해 평균 3~4건의 피랍 사건이 발생한다"며 "피랍 등 해외 사건사고에도 일종의 트렌드가 있어 세계 경제 상황과 지역 정세에 따라 유형이 조금씩 바뀐다"고 말했다.

최근 해적에 의한 피랍 사건의 경우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가격이 치솟은 석유 강탈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기니만 유류운반선 피랍 사건 때도 해적은 3000t의 석유를 뺏고 선박을 풀어줬다.

또 동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역에 청해부대와 국제연합군 등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펼치자 상대적으로 경계가 느슨한 서아프리카로 해적이 몰리는 동향도 있다. 정부는 지난해 2월부터 해적 피해가 우려되는 해역을 통과하는 선박에 해상특수경비원이 반드시 승선하도록 하는 등 피랍 사건별로 맞춤형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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