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덕 전 감독, 비난도 기록도 모두 역사가 된다
[이준목 기자]
설 연휴에 야구팬들에게 뜻밖의 비보가 전해졌다. 한국프로야구 1세대의 전설적인 감독이자 영원히 깨지지 않을 한국시리즈 첫 우승 사령탑인 김영덕 전 감독이 별세했다
김영덕 전 감독은 지난 1월 21일 노환으로 인하여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 전 감독의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호실에 마련됐고, 발인은 25일 오전 10시 30분이다.
한국야구 올드팬 세대에게 김영덕은 결코 잊을수 없는 이름이다. 흔히 한국야구 1세대를 대표하는 원로들로 꼽히는 김응용-김성근-김인식 감독의 '삼김'은 비교적 최근까지 야구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젊은 팬들에게도 친숙한 편이지만, 이들보다 몇 년 위의 선배로 동시대에 경쟁했던 김영덕은 비교적 빨리 잊힌 편이다.
김영덕을 기억하고 있는 팬들도 대부분 프로 시절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로 떠올리지만, 알고보면 그가 선수시절만 놓고봐도 대한민국 역대 투수계보에 이름을 올릴만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의외로 그리 많지 않다.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은 1936년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에서 1956년부터 1963년까지 투수로 활약했다. 1군에는 1959년에 데뷔했고, 그해 호크스가 정상에 오르며 본인은 비록 경기에는 출장하지 못했지만 구단의 역사적인 일본시리즈 첫 우승 멤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김영덕의 호크스 시절 1군 기록은 통산 69경기(158.2이닝)에서 7승 9패 평균방어율 3.57이었다. 준수한 자책점에 비하면 출장경기수가 너무 적은 편인데, 당시는 선수층이 얇고 주축 에이스급 투수들 몇 명이 현대 기준으로는 말도 안되게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50-60년대였다. 당시의 호크스는 투수력으로 시대를 호령하던 강팀이라 이래저래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김영덕은 본인이 재일교포 시절이라 당시 팀내에서 은근히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김영덕은 만 28세였던 1963시즌을 끝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은퇴하고 모국인 대한민국으로 건너왔다. 본인과 같은 재일교포 출신이자 일본 사회인야구에서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후배 김성근이 한국에 와서 자리를 잡은 것도 김영덕의 모국행 결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아직 프로가 출범하기도 훨씬 전인 실업야구 시대였다. 일본에서는 평범한 투수 취급을 받았던 김영덕은 프로 출신의 클래스 차이를 보여주며 국내 실업야구를 단숨에 평정했다.
대한해운공사(1964)-크라운맥주 (1965)-한일은행 (1966~1969)의 3팀을 거치며 김영덕은 한 차례 퍼펙트게임과 2차례의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데뷔 첫해인 1964년에는 33경기 255이닝 동안 단 9실점하여 자책점이 불과 0.32라는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최전성기는 1967년으로 25경기에 등판해 17승 1패 승률 94%에 평균자책점은 0.49을 달성했다.
주무기로 꼽힌 슬라이더는 역시 재일교포 출신인 신용균이 먼저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낯선 슬라이더 구종의 위력을 본격적으로 전파한 인물이 김영덕이라는 데는 야구계의 평가가 일치한다. 또한 김영덕은 포크볼과 싱커도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실업야구 시절까지만 해도 일반하된 투타 겸업에 따라 타자로서도 3할 타율을 기록할만큼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고 최동원-선동열-박찬호-류현진-김광현 등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역대 최고 투수'의 계보를 프로 이전인 아마-실업야구까지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원조에는 바로 '고대 괴수' 김영덕이 나온다. 또한 김영덕은 자신의 선수시절 마지막팀이었던 한일은행에서 감독 겸 선수로 뛰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프로 감독과 우승까지 경험했으니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대표적인 '스타 출신 감독' 1세대 이기도 하다.
김영덕은 한일은행-장충고-북일고 감독을 거쳐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OB 베어스의 초대 사령탑을 맡았다. 당시 창단 멤버를 보면 원년 22연승의 대기록을 세운 에이스 박철순을 필두로 김경문, 윤동균, 김우열, 신경식, 계형철, 김유동 등 올드팬들에 친숙한 호화멤버들을 보유했다. 또한 코치진에도 타격코치에 이광환, 투수코치에는 김성근 등 지도자로서 한국야구에 전설적인 업적을 세우게 될 잠룡들이 즐비했다.
김영덕의 OB는 당시 전후기리그로 나뉘어 치러진 프로야구에서 28승 8패로 전기리그를 우승했고,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는 후기리그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를 격파하며 첫 우승을 차지했다.
김영덕은 이후 지도자로서도 선수시절 못지않게 승승장구했다. 삼성 라이온즈(1984-86)와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1988-93)의 감독을 역임하며 팀을 꾸준히 가을야구에 진출시키면서 프로야구 초창기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1985 시즌에서는 전무후무한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한국시리즈 없는 우승,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2회 우승을 기록한 감독에 이름을 올리며 지도자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김영덕은 빙그레에서도 부임 5년간 무려 팀을 4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지만 여기서는 아쉽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만일 그랬다면 김영덕은 한국야구사에서 전무후무한 '세 팀에서 우승을 달성하는' 대기록의 주인공이 됐을 것이다. 김영덕은 1993시즌 빙그레가 부임 이후 최악의 성적인 5위로 추락하며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이는 그의 지도자 전체 커리어에서 1군 감독으로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KBO리그에서 11시즌동안 김영덕은 정규리그 승률(전후기리그 시절은 합산) 1위 5회, 우승 2회(한국시리즈 1회) 통산 승률 1207경기 707승 20무 480패 (승률 .596)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그가 이끌던 팀이 3위 미만-5할 이하의 성적을 거둔 것은 단 2시즌(1983년 OB, 1993년 빙그레, 각 5위) 뿐이다.
이후로는 LG 트윈스에서 투수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1996-98)을 역임한게 현장에서의 마지막 경력이다. 빙그레 감독에서 물러나던 시기가 불과 50대 중반이었고 각 팀에서 모두 확실한 성과를 남겼던 것에 비하면, 이상하리만큼 너무 일찍 현장에서 사라저버린 느낌이 있다. 동시대를 풍미한 라이벌이자 후배인 김응용-김인식-김성근 등이 60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현역으로 활동했던 것과 대조된다.
모든 역사적 인물들이 그러하듯, 김영덕에게도 빛과 그림자, 사실과 오해, 찬사와 혹평 등이 공존했다. 지금까지도 김영덕에 대한 알려진 올드 야구팬들의 보편적 이미지는 이른바 '원조 김경문', 만년 2인자이자 정규시즌에 비하여 단기전에 약한 감독이라는 꼬리표였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일단 김영덕은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나 여러 차례 정상을 경험했던 인물이다. 다만 그에게 2인자 꼬리표가 붙게 된 것은 최동원의 역사적인 4승 역투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1984년 한국시리즈, 당대 최강이던 김응용의 해태 타이거즈에게 번번이 물을 먹으며 정상도전이 좌절된 빙그레 시절의 이미지가 워낙 깊이 각인된 탓이다.
실제로 김영덕은 KBO리그에서 2회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한국시리즈에서의 우승은 원년 한 번 뿐이었고, 이후 6번의 한국시리즈 도전에서는 번번이 준우승에 그쳤다. 이중 대부분은 상대보다 정규시즌 성적이나 전력에서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도 '업셋'을 당했으니 한국시리즈에 약한 감독이었다는 지적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김영덕 역시 승리를 위하여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비정하고 냉혹한 승부사'의 이미지가 강했다. 82년 원년 우승 당시 에이스 박철순은 24승 4패에 224.2이닝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닝을 소화했는데, 당시는 리그 80경기 체제였고, 박철순은 당시 OB가 거둔 56승의 절반에 가까운 승수를 혼자 책임진 것이었다.
이는 혹사에 대한 문제인식이 훨씬 덜했던 당시에도 비정상적이라는 지적이 많았고, 실제로 박철순은 원년 우승 이후 부상으로 쓰러지며 시련의 야구인생을 보내야했다. 김영덕 감독이 원년 우승에도 불구하고 박철순의 선수생명과 맞바꿨다는 비난을 들어야했다. 84년 KS에서 최동원을 연투시킨 강병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투수들의 어깨를 갈아넣은 김성근과 함께, 김영덕이 우승 감독임에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된 이유다. 다만 당사자인 박철순은 훗날 인터뷰에서 김영덕 감독의 강제 혹사설을 부정하며 옹호했다.
또한 김영덕은 성과를 위해서는 특정팀에게 고의패배를 불사하거나, 자신의 선수들에게 타이틀을 안겨주기 위한 '경기조작'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1984년 한국시리즈의 운명을 바꾼 '져주기 게임'은 김영덕의 대표적인 흑역사다. 당시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시리즈행을 예약했던 삼성은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롯데와 OB 중 상대적으로 쉽다고 판단한 롯데를 고르기 위하여 일부러 경기를 패배했다.
당시 지라고 내보낸 2진급 선수들이 감독의 의중과 달리 너무 잘해서 오히려 리드를 잡게되자 1군 선수들을 투입하여 노골적인 실책성 플레이까지 벌이는 추태를 펼쳤다. 당시 지상파 중계로 이를 생생하게 목격한 야구팬들은 크게 분노했고 엄청난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김영덕의 대표적인 어록으로 알려진 '비난은 짧지만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표현도 이 때 탄생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초인적인 역투에 밀려 만만하게 여겼던 롯데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치며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됐다. 84년 한국시리즈는 지금도 야구팬들에게 손꼽히는 '정의구현 시리즈'로 통한다. 삼성은 이듬해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자존심을 세웠지만, 단기전인 한국시리즈에서는 오랫동안 우승하지 못하다가 무려 18년이 지난 2002년에야 첫 우승을 차지하며 오랜 흑역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김영덕 감독은 먼 훗날에야 "84년 한국시리즈의 일은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이만수, 유승안, 이정훈, 송진우 등 자신이 데리고 잇던 선수들의 '타이틀 밀어주기'를 위한 숱한 기록조작 의혹에 대해서는 "감독으로서 팀을 위해서 희생한 선수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다. 그 시절도 돌아가도 똑같이 할 것"이라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활동했던 1950-60년대의 일본식 야구관을 이어받은 인물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한다.
김영덕은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이유로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은근히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과에 집착해야만 했던 것도, 야구인으로 화려한 족적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떠난뒤 비교적 빠르게 야구계 주류에서 잊혀진 이유 등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항상 텃세를 당하고 '경계인'으로서 살아야했다는 애환은, 김성근같은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들이 자주 언급하는 레퍼토리다.
하지만 이 역시 어느 정도는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백인천-김성근 등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에 와서 더 성공적으로 오랫동안 자리잡은 인물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김영덕 본인만 해도 일본 프로야구 시절은 몰라도, 한국에서는 실업야구 시절부터 프로에서 무려 세 팀의 지도자를 거쳤을만큼 꾸준히 야구계 주류에서 누구보다 중용받고 혜택을 누린 인물이었다. 30대가 되어서야 고국 땅을 처음 밟았지만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일반팬들은 그가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오히려 김영덕 감독은 국적보다도 개인의 행적을 둘러싸고 논란에 휩싸인 경우가 많았다. 한일은행 감독 시절에는 김응용, OB에서 삼성 감독으로 옮기던 시절에는 김성근을 제치고 감독직에 오르는 과정에서 후배들의 자리를 고의로 빼앗았다는 의혹에 시달렸다.
이로 인하여 김응용-김성근과는 현역 감독 시절에는 불편한 앙숙관계가 되었고, 이들의 팀과 격돌할때마다 심심하면 신경전과 난투극까지 벌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김영덕 감독 본인도 삼성 감독 시절 친정팀이자 옛 제자들인 OB와 경기중 상대 선수를 폭행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밖에도 빙그레 감독 시절에는 팀내 파벌을 방관하고 오히려 묵인했다는 의혹을 산 일도 있었다.
김영덕 감독은 원래부터 활발한 성격이 아니었고 오랜 활동에도 불구하고 야구계 인맥도 넓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감독직을 겪으며 각종 비난에 시달리면서 한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가 1990년대 후반 현장에서 물러난 이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과의 교류에 거리를 둔 것도 야구계에서 빨리 잊혀지게된 또다른 이유였다. 또한 김 감독은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이글스 시절에 자신을 우대해준 김종희-김승현 회장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다른 팀에는 더 이상 1군 감독을 맡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 약속을 지켰다.
종합하자면 김영덕 감독은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나란히 공존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분명히 한국야구사에서 선수로서나 지도자로서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야구인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현역 시절에 보여준 몇몇 결정적인 오점과 실책이 강하게 부각되며 오늘날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각인된 측면이 있다.
역사는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기억한다. 같은 팩트라고 해도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평가는 달라진다. 야구인 김영덕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이제 온전히 팬들과 역사의 몫이 됐다. 그에게 남겨진 '비난과 기록도 모두 역사의 일부'로 남을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빨갱이 욕설에도 침묵, 보수도 쉽게 폄훼 못하는 인물"
- 명절 당일, 여자들이 모두 집을 나간 까닭
- 몸이 찰 때 이거 넣고 밥 지어 보세요, 보양식 됩니다
- 양평의 유일한 국보, 알고 보면 가슴이 아프다
- 이 화가가 30년 걸려서 알게 된 '작가 정신'
- 남편은 아내 꿈 뒷바라지, 아내는 "남편 믿는다"... 이 부부 좀 보세요
- 송골매가 선사한 시간 여행, 엄마는 세 번 감탄했다
- 신규확진 1만6624명…1주전보다 약 1만6천명 줄어
- 미 FBI, 바이든 사저 수색서 기밀문서 추가 확보…특검 수사 속도
- 병원서 설 보내는 가족... 처가 안 가는 첫 명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