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쿠데타, 새로운 고난과 투쟁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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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에서 서민호가 정치역량을 발휘하는 기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61년 5월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ㆍ16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고 민주주의가 좌초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5·16쿠데타 이후 금지되었던 정치활동이 1년 7개월 만인 1963년 1월 1일부터 재개되고 정쟁법에서 해제되어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섰다.
군사쿠데타를 승인해주는 대가로 비교적 말을 잘 듣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일간의 국교를 정상화시켜서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 미국의 기본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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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기자]
▲ 굴욕외교라는 거센 비판속에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
ⓒ 자료사진 |
제2공화국에서 서민호가 정치역량을 발휘하는 기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61년 5월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ㆍ16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고 민주주의가 좌초되었기 때문이다. 8년만의 석방과 국회 등원 1년 여 만에 다시 당하게 된 정치적 시련이었다.
그는 박정희 등 쿠데타 주도세력이 일본군(만군) 출신이라는데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가졌다. 자신이 3·1혁명에 참여하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 일본군인이 되어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었다.
쿠데타 세력은 서민호의 지명도와 꿋꿋하게 살아온 경력을 평가하여 유혹의 손길을 보냈다. 하지만 단호히 선을 그었다. 주도자가 일본군 출신이라는 전력과, 숭고한 학생들의 피의 댓가로 수립된 민주정권을 8개월 만에 쿠데타로 타도한 군부세력을 지지하거나 여기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국회에서 제기했던 남북교류론을 빌미로 구속되어 10개월 동안 투옥되었다.(<연보>) 그리고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이게 되었다.
그는 5·16쿠데타 이후 금지되었던 정치활동이 1년 7개월 만인 1963년 1월 1일부터 재개되고 정쟁법에서 해제되어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섰다. 그리고 이 해 11월 26일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거주지인 서울 용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소속은 자유민주당(자민당)이었다. 그는 10월 19일 김도연 등과 함께 자민당에 입당,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자민당은 총선에서 9명이 당선,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불가능하여 군소정당의 비애를 감수하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각종 부정비리를 파헤치는 야권의 맹장 노릇을 하였다. 그는 11월 11일 국회에서 남북한 서신교류 등을 제의했다. 1964년에는 자민당이 제1야당인 민정당(民正黨)과 통합하였다.
▲ 한일회담 반대운동. |
ⓒ 국가기록원 |
박정희 정권은 반대세력을 계엄령으로 봉쇄하면서 굴욕회담을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서민호 등 8명의 야당 의원이 의원직 사퇴라는 배수진을 치고 반대했으나 끝내 막아내지 못하였다. 그는 정치적 신의를 이유로 원내에 복귀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수야당(인)에 많은 회의를 갖게 되었다. 의원총회에서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하고도, 이런저런 명분을 대고 원내에 복귀하거나,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에 있어서도 적당히 발을 빼는 야당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다.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지만, 외교를 정치수단으로 활용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국가적 재난에 속한다. 합헌정부를 쿠데타로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는 정치적 조급증에 시달렸다. 비록 민정이양을 통해 대통령 선거를 거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정통성을 부여받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무엇인가 가시적인 성과를 국민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것이 졸속적인 한일회담 추진의 배경이 되었다. 여기에는 일본군 출신으로서 개인적인 '향수'도 크게 작용했을 터이다.
마침 1960년대에 들어 미국은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한일간의 국교정상화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고 나왔다. 군사쿠데타를 승인해주는 대가로 비교적 말을 잘 듣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일간의 국교를 정상화시켜서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 미국의 기본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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