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에서 마을의 흉물로...“머지않아 마을 전체가 사라지겠지” [4500km 폐교로드④]
“나를 포함해 우리 6남매가 모두 이 학교를 나왔는데, 지금은 흉물도 이런 흉물이 없어. 어린 시절 뛰놀던 마음의 고향인데….”
지난해 10월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작금마을(금성리)에서 만난 72세 노인은 밭일을 멈추고 기자를 자신의 모교로 안내했다. 1999년 폐교한 금성초등학교. 노인은 이 학교 9회 졸업생이다.
학교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울 만큼 황폐했다. 잡목과 수풀로 뒤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7300㎡(약 2200평) 부지와 건물은 23년간 방치됐다. 그 사이 마을도 쇠락했다. 노인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생만 180~200명이었는데 지금은 마을 전체가 200가구가 안 되고, 그나마 60대도 얼마 없다”고 했다. 그는 “여기가 돌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부락이었는데 젊은이들은 모두 객지로 나가고, 아이들은 조손 가정이 아니면 구경도 못 한다”며 “우리 세대가 죽으면 마을도 이 학교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돌산에서만 9곳 폐교…10년 새 여수 학생 7만 명 줄어
1990년 이후 여수 돌산읍에서만 9개 학교(분교 포함)가 폐교했다. 여수 전체로 따지면 64곳이 문을 닫았고, 지난해에만 4개 학교가 사라졌다. 여수는 순천에 이어 전남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지만 학령인구 감소는 피할 수 없었다. 최근 10년 새 유치원생을 포함한 여수의 학생 수는 6만8400여 명 줄었다. 지난해 말 기준 전남 해남군 인구 전체가 사라진 셈이다.
전남 신안군 사정도 다르지 않다. 1004개의 섬으로 이뤄진 신안군에서 가장 큰 섬인 압해도 신월항에서 배로 3분 남짓 거리인 고이도. 섬 초입에 있는 압해초등학교 고이분교는 2018년 문을 닫았다. 폐교 당시 학생은 단 한 명이었다. 이후 단층 짜리 학교 건물은 방치됐다. 학교 안 교실엔 책걸상이 모두 치워졌지만, 칠판과 교실 표지판은 그대로였다. 한 교실에는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쓴 글과 그림이 붙어 있었다.
“폐교될 때까지 버틴 것만도 대단한 일”
외지에서 살다 몇 년 전 귀향했다는 모성현(50)씨는 “90년대 후반부터 전교생이 2~3명으로 줄었다”며 “폐교될 때까지 오래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모씨는 이 학교 37회 졸업생이다. 그는 “35년 전엔 우리 학교에 200명 가까이 다녔다”며 “지금은 섬 전체 인구가 200명을 갓 넘는다”고 말했다(실제로 고이도엔 127가구 214명이 거주한다). 그는 “신안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권은 대부분 목포·무안”이라며 “떠날 사람들은 다 떠났는데 신안에 더는 폐교될 학교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모씨의 두 살, 세 살배기 자녀들은 매일 배를 타고 무안에 있는 어린이집을 다닌다.
신안군, 2000년 이후 41개 학교 폐교
지금까지 신안에선 83개 학교가 폐교됐다. 2000년 이후에만 41곳이 사라졌다. ‘줄폐교’는 끝난 걸까. 신안 추포도에 있는 암태초 추포분교를 비롯해 6개 학교는 현재 휴교 중이다. 가거도초를 포함한 4곳은 학생 수가 1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또한 신안에 있는 중학교 13곳 중 6곳은 전교생이 20명 이하다. 익명을 원한 전남교육청 관계자는 “휴교는 폐교의 수순이고, 10명 이하 학교도 결국 통폐합될 수밖에 없다”며 “지자체 차원에서 폐교를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여수·신안=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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