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한다고 손해냐" MB가 잡은 男, 14년뒤 尹에 37조 쐈다
"기왕에 안 된 것, 전화한다고 해서 더 손해 볼 것도 없지 않나. 중동 왕족들이 좀 그런 면이 있다."
2009년 11월 초 청와대 집무실의 이명박(MB)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참모들은 아랍에미리트(UAE) 실력자이자 왕세제인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현 대통령)과의 전화 연결을 계속 시도중이었다. 하지만 그 통화는 계속 미뤄졌다. 왕세제 측은 통화 약속을 잡은 뒤에도 계속 시간을 미뤘고 또 날짜를 미뤘다. MB가 원하는 통화의 용건은 UAE 바라카 원전 수주 문제였다. 참모들은 '어차피 프랑스가 수주하는 쪽으로 기울어 통화를 피하는 것 같은데, 대통령 자존심도 있으니 그 정도로 하고 끝내시라'는 취지로 MB를 만류했다. 하지만 MB는 "전화한다고 손해 볼 건 없다"며 전화 연결을 이렇게 계속 재촉했다.
결국 11월 6일 첫 통화가 연결됐지만, 무함마드 왕세제의 태도는 까칠하고 사무적이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 그는 "다른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라고 물어왔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태도였다. MB는 원전 외에 경제와 교육, 안보 협력 파트너로서 한국의 장점까지 부각하며 "사절단을 파견해 직접 설명 드릴 기회를 갖고싶다","양국이 신뢰를 갖고 형제 국가와 같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실낱같은 가능성을 이어가려 했다.
닷새 뒤 전화를 걸어온 무함마드는 "대통령님과의 통화 뒤 입찰 결정을 좀 연기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기대 이상의 낭보였다. 당시 MB는 참모들에게 "기업 그만두면서 세일즈는 끝났나 했더니, 또 하게 된다"라면서도 원전 수주문제에 열심히 매달렸다. 한국 대표단의 UAE 방문 이후 프랑스로 완전히 기울었던 판세가 뒤집어졌다. 무함마드 왕세제와 MB 사이 여섯 차례 통화 끝에 UAE는 결국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기적과 같은 반전이었다. MB는 그해 12월 26일~27일(현지시간) 현지를 방문했고, 양국 정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전 사업 계약서가 서명됐다. 한국형 원전의 첫 수출 성공 사례였다.
당시 MB 청와대 출입기자 였던 필자 역시 공군 1호기를 타고 아부다비를 다녀왔다. 한국 시간 기준 1박3일의 강행군으로, '400억 달러 규모(약 49조원)한국형 원전 첫 수출'이라는 큰 뉴스를 감당하느라 시내 구경은 꿈도 못꾸고 프레스센터에서 기사만 쓰다 돌아온 기억이 남아있다.
이후 왕세제의 한국 방문, 특전사 부대(아크 부대)의 UAE 파견 등을 통해 양국은 '100년간 우정이 지속되는 형제국가'의 인연을 공고히 했다. MB는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2008-2013』에서 원전 수주 성공에 대해 “감정과 우정을 중시하는 중동 국가의 정서를 고려해 ‘형제국 같은 협력관계’를 강조하고, 원전 외에 그들이 관심 있는 군사·교육·기술 분야 협력을 약속한 게 주효했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대통령이 된 14년전의 무함마드 왕세자는 지난주 UAE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300억 달러(약 37조원)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 "난 대한민국 영업 사원"이라고 천명한 윤 대통령 세일즈 외교의 성과였다. 이런 큰 성과의 토대에는 14년 전 부터 쌓이기 시작한 양국 간의 우정과 형제애가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무함마드 대통령은 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제2의 고향"이라며 대한민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제2 중동 붐'을 갈망하는 한국에 UAE를 비롯한 중동은 약속과 기회의 땅이다. 다른 나라와의 외교도 비슷하겠지만, '의리'와 '형제애'에 특히 민감한 중동 왕조들과의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신뢰일 것이다. MB도 윤 대통령의 37조원 투자 유치에 크게 기뻐하며 UAE와 돈독한 신뢰를 이어간 윤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이런 게 외교의 선순환이다.
서승욱 논설위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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