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이번 설은 우리가 가족이 돼줄게”

김용현,양한주 2023. 1. 21.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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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빚’ 갚으러 온 형… 동생들과 나누는 작은 온기
자립준비청년 출신들 ‘후배’와의 만남
자립준비청년 출신인 김성민(오른쪽) 브라더스키퍼 대표가 지난 16일 경기도 안양에 있는 자립준비청년 박순현씨의 집을 찾아 함께 식사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함께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명절 저녁상을 차렸다. 김 대표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설 분위기를 우리 자립준비청년들도 함께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박씨는 “형 같이 챙겨 주는 마음에 감사하다”고 했다. 안양=김지훈 기자


설 연휴를 앞둔 지난 17일 경북 김천의 임마누엘 영유아원. 김상준(25)씨와 이영신(29)씨, 이성남(45)씨가 아이스크림이 잔뜩 든 종이봉투를 들고 이곳을 찾았다. 세 사람은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다가 자립을 한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 출신이다. 가족의 돌봄 대신 보육시설에서 자란 이들은 이제 독립해 사회로 나섰지만, 아직 시설이 고향집 같다고 했다.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10여명이 모여 사는 이 집에 ‘선배’들이 들어서자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일행을 쳐다봤다. 일부는 처음 본 얼굴이 낯설었는지 방으로 숨었다. 상준씨가 “아이스크림 사 왔다”고 소리치자, 아이들이 쭈뼛거리면서 방에서 나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상준씨가 “얘들아, 같이 먹자”라며 말을 건네자, 주변을 살피던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에 달려들었다. 영유아원 주변에는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없다 보니 선배들이 가져온 브랜드 아이스크림은 아이들이 모처럼 접하는 간식이었다. 상준씨는 아이들이 어떤 선물보다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할 거라는 걸 안다고 했다. 자신도 같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경북 김천 임마누엘영유아원 한 보육실에서 지난 17일 자립준비청년 출신 이성남(윗줄 오른쪽 두 번째)씨와 김상준(아랫줄 맨 왼쪽)씨, 이영신(아랫줄 맨 오른쪽)씨가 영유아원 아이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김천=최현규 기자


상준씨와 영신씨, 성남씨는 어린 시절 겪었던 설 명절이 떠올라 생각이 많아졌다. 친부모 얼굴을 모르는 성남씨는 “그래도 친척이나 부모와 연이 닿는 친구들은 명절 때면 밖으로 외출을 나갔다 왔다. 새 옷도 가져오고 세뱃돈도 받아오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고 말했다. 영신씨는 “늘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왜 없을까. 왜 버려졌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외로웠었다”며 “아마 여기 있는 아이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나. 이번 설은 우리가 가족이 돼주러 왔다”고 했다.

상준씨는 보육원에서 같이 자란 쌍둥이 동생을 4년 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시설에서 나와 독립을 했던 상준씨에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동생도, 그의 장례를 치르는 것도 감당하기에 벅찬 일이었다.

그때 자립 선배인 성남씨가 ‘큰 형’을 자처하며 장례 절차를 챙겨줬다. 성남씨는 “보육원에서 같이 자란 내 동생이 떠났을 때도, 후배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을 때도 보육원 출신 50여명이 찾아와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며 “비록 가족은 없지만, 우리끼리는 마음의 빚이 있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자립준비청년 출신 이성남(사진 왼쪽)씨와 이영신(사진 오른쪽)씨가 지난 17일 설 명절을 앞두고 유년 시절을 보냈던 경북 김천 임마누엘영유아원을 찾아 김정숙 전 원장의 손을 맞잡았다. 세 사람은 자립 이후 삶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김천=최현규 기자


자립 후의 현실이 고달팠던 이들 자립준비청년은 힘들 때면 종종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천을 떠올렸다고 한다. 상준씨와 영신씨도 다른 지역 직장에 취업했다가 지난해 다시 김천에서 자리를 잡았다. 성남씨도 임용고시를 거쳐 교사가 되고는 김천으로 돌아와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지난해부터는 영천교육지원청 장학사로 근무 중이다. 또 2019년 한국고아사랑협회도 설립해 자립준비청년의 어려운 점을 살피고 있다.

상준씨는 2021년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한 회사에 취업했었다. 그는 “입사 후 기숙사 1인실에서 살게 되면서 ‘처음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생각에 정말 기뻤다”면서도 “하지만 1년쯤 지나서는 ‘이제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들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쓸쓸했다”고 토로했다. 상준씨는 얼마 안 돼 그가 자란 김천행을 택했다.

충남 천안에 있는 회사에서 일했던 영신씨는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기절했다가 깨어난 이후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 홀로 찾아가서야 뇌전증 증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자립을 한 뒤에도 보육원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할까 봐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쉽지 않았다”며 “특히 몸이 아플 때면 의지할 곳이 없어서 서러웠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김천으로 내려온 이후 안정을 찾았다. 보육원에서 만났던 자립전담요원이 발 벗고 나서 그의 일자리와 살 곳을 알아봐 준 덕분이었다.

시설 밖 서로 의지하는 삶

어린 시절을 보낸 보육원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집’이 돼 주는 건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자립준비청년 박순현(29)씨는 명절에도 보육원을 절대 찾지 않는다고 했다. 그곳에 대해서는 학대받은 기억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명절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보낸 적도 없다. 독립 후 현장 일용직으로 7년째 근무 중인 그는 올 설 연휴에도 내내 이삿짐 나르는 일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김성민(38) 브라더스키퍼 대표는 그런 순현씨에게 특별한 명절을 선사하기로 했다. 브라더스키퍼는 자립준비청년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다. 김 대표 역시 자립준비청년 출신이다. 두 사람은 지난 16일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본 뒤 경기도 안양의 순현씨 집에서 저녁상을 차렸다.

순현씨가 선택한 메뉴는 꼬막비빔밥, 새우튀김, 족발, 유부초밥 등이었다. 여기에 김 대표가 색색의 송편을 더했다. 김 대표는 브라더스키퍼의 지원금으로 명절 음식 외에도 즉석밥, 밀키트 등을 사서 순현씨에게 챙겨줬다.

브라더스키퍼는 21일에는 20명 안팎의 자립준비청년들을 서울 서초구 한 공간으로 초대해 명절 행사를 진행한다. 그는 “자립준비청년들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설 분위기를 함께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며 “아이들도 행사를 기다리면서 2개월 전부터 연락해올 정도로 호응이 높다”고 말했다.

행사에 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김 대표가 순현씨처럼 직접 찾아가 챙긴다. 단순히 식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간의 안부를 묻고 홀로 자립한 생활이 어렵지 않은지 등에 대한 상담도 진행된다. 순현씨의 경우도 자립 후 경북 구미에서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보낼 때가 있었는데, 그를 안양으로 데려와 돌보고 치료받도록 도운 이가 김 대표였다. 순현씨는 브라더스키퍼에서 일하는 또 다른 자립준비청년 출신 권용수(26)씨의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지난 16일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김 대표에게 순현씨는 멋쩍어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젠 정말 자립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어요. 오늘 챙겨준 마음 덕분에 다음 모임에 용기 내 나갈 수 있을 것 같기도… 고민해 볼게요.”

김천=김용현 기자, 안양=양한주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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