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나도 생에 감사해
나처럼 불운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얼마나 불운한지 운을 떼려면 이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험생 시절, 꼭 가고 싶었던 대학 예비 13번을 받았다. 합격자들이 한 명 한 명 입학을 포기할 때마다 희망은 점점 커져 갔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열두 명이 입학을 포기해 예비 12번까지 추가 합격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예비 12번이 오리엔테이션까지 가 놓고서는 자퇴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녀석이 입학을 진작에 포기했더라면 내가 그 대학에 갈 수 있었을 텐데.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스무 살 내내 방황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사랑니를 뽑으러 치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치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려는데 의사의 부름에 다시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는 말했다. 잇몸을 절개하고 매복 사랑니를 뽑아야 하는데 실수로 멀쩡한 어금니를 뽑았다고 말이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의사 앞에서 나는 정말 울어버리고야 말았다. 이후로도 자잘한 불운은 계속됐다. 해외여행을 가서 여권을 도둑맞는다든지, 나무 의자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반으로 빠개져 꼬리뼈가 골절된다든지…. 열심히 작업한 파일을 몽땅 날려 먹은 횟수는 열 손가락에 열 발가락을 다 합치고 남의 손발을 빌려와도 모자랄 지경이다.
희망찬 새해가 밝았음에도 불운은 나를 피해 가지 않았다. 일이 유독 몰려 단 하루라도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코로나에 걸려버린 것이다. 정수리가 터져나갈 듯 열이 끓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골이 흔들려 똑바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남들은 서너 번씩 걸린다는 역병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 온 나였건만, 하고많은 날을 다 제쳐두고서 하필이면 바빠 죽겠는 이 시점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뒤로 자빠져도 코는 물론 앞니까지 와장창 깨질 사람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잠이라도 오면 좋으련만 자다 깨기를 수차례 반복하다 보니 더는 잘 잠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다시 한번 깊은 잠에 빠져들기를 기원하며 재미없어 보이는 오디오북을 수면제 삼아 틀어놓았다. 저자는 말했다.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이다.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겪게 되는 과정일 뿐 결코 일이 잘못돼 가는 게 아니라나 뭐라나. 그러니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매사에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는 걸 누가 모를까. 늘 부정적인 나이지만 이런 나도 감사의 중요성을 알기는 안다. 그리하여 습관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곤 한다. 그런데 사실 진심으로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배고플 때 밥 먹을 수 있으니까 감사하지, 뭐. 집은 코딱지만 해도 춥지는 않으니까 감사하지, 뭐. 돈은 많이 못 벌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감사하지, 뭐. 그냥 감사하다고 하면 될 것을 빈정거리듯 ‘뭐’ 자를 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이번에도 역시 억지 감사를 했다. 죽도록 아프지만 죽지는 않았으니까 감사하지, 뭐.
시간이 흘러 열은 가라앉고 바깥출입도 가능해졌지만 집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동안 밀린 일이 산더미 같아서 책상 앞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가운 친구에게서 얼굴이나 보자는 연락도 왔지만 바쁘기도 바쁘거니와 기력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다음을 기약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일만 하는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만일 아프지 않았더라면 일하기 싫어서 몸을 배배 꼬다가 친구의 호출에 옳다구나 하고 뛰쳐나가 흥청망청 놀았을 텐데. 중요한 시기이니만큼 한눈팔지 말고 일에 집중하라고 나를 아프게 했구나. 참 감사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낯설고도 신기한 것도 잠시. 감사의 물꼬가 트이고 나니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만, 토크쇼에 나온 김혜자 선생님이 삶의 감사함에 대해 말씀하시는 모습도 보게 됐다. 지금부터라도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면 나도 저렇게 고운 눈빛을 가질 수 있을까? 거울 속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모든 것에 감사하다고 되뇌어 본다.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이 김혜자보다는 노홍철 쪽에 가까워 보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결론적으로 긍정적이기만 하면 되는 거지. 감사한 삶을 향해. 좋아, 가는 거야!
이주윤 작가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토끼와 거북이’ 합사 전시한 코엑스…“학대 아냐?”
- ‘캔 꼭지’ 드레스 입고 미인대회 출전…어떤 사연이?
- “어렵게 개업했는데”… 모텔방 ‘쓰레기장’ 만들고 ‘쌩’
- 男소변기 위 유리?…女화장실 훔쳐보는 거울이네 [영상]
- 12대 나갔는데 주차비 ‘0원’?… 꼬리물기 수법 덜미 [영상]
- “‘싸패’ 이기영, 동거녀 살해전 ‘먹으면 죽는 농약’ 검색”
- 여의도 스카이라인 바뀐다… 48년된 ‘한양’ 54층 재건축
- 중대재해법에도 근로자 눈물 뚝뚝… 기업은 더 ‘똑똑’해졌다
- ‘인하대 성폭행 추락사’ 가해학생 1심 징역 20년
- 김진욱 공수처장 “크든 작든 성과 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