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지긋지긋…이곳의 삶 말로 다 못해" 잿더미 구룡마을 눈물

윤정민, 김민정, 이찬규, 우수진 2023. 1. 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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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서울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발생한 화재는 약 4시간 동안 44가구를 태우고 나서야 완전히 진화됐다. 인명피해는 없었다. 소방대원과 경찰 등의 빠른 대처 덕분이지만, 이웃들이 초기에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영하의 날씨에 속옷 바람으로 뛰어다니며 상황을 알린 주민들의 활약도 있었다.

불은 이 날 오전 6시 20분쯤 구룡마을 4지구의 한 집 안에서 시작됐다. 이웃한 집들 대부분이 합판과 비닐 등을 덧대놓은 상태라 불은 빠르게 옮겨붙었다. 화재 사실을 처음 인지한 건 부인이 병원에 입원해 불이 시작된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던 70대 후반 A씨였다. 경찰과 소방 등에 따르면 A씨는 옷을 챙겨 입을 경황이 없어 내복만 입은 채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곤 주변의 집들을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리고, 밖으로 대피하라고 알렸다고 한다. 또 A씨가 문을 두드려 밖으로 나온 주민들 역시 다시 이웃집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을 깨운 것으로 전해졌다.

화재로 집이 불탄 주민 이모(63)씨는 “아침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알려줘서 밖으로 대피했다”며 “급하게 대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양말도 못 신고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화재 원인을 조사 중인 경찰 관계자는 “대부분 판잣집이라 불이 순식간에 주변으로 옮겨붙어 큰불이 됐는데, 다행히 불이 시작된 집 주변의 주민들이 빨리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했다.


“애들 아빠 산소에 가려 했는데…” 호텔에서 설 맞는 주민들


서울 개포동 구룡마을 4지구에서 화재가 발생해 44가구가 불에 타고 62명이 집을 떠나 임시 숙소로 이동했다. 김민정 기자
다치거나 숨진 사람은 없었지만, 설 연휴 전날 화재로 보금자리를 잃은 구룡마을 주민들은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집이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진 이모(70)씨는 “설 연휴에 애들 아빠 산소에 가기로 했는데…. 불이 나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35년 전 사업에 실패한 뒤 구룡마을로 이사 온 그는 마을을 ‘사람들이 정이 많은 동네’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낡은 집과 전기시설 등에는 좀처럼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씨는 “내가 사는 곳도 30년 전쯤인가 불이 나서 다시 지은 곳인데, 이번에 또 불에 탔다. 침통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시간 자고 깨고, 또 한 시간 자고… 제대로 잠을 못 잔다. 우리 집 앞에 전기선이 합선돼 불이 붙어서 소방대원들이 출동해 끈 적도 있다. 마을 전체가 열악한데, 주민들이 고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화재로 오래전부터 모아 온 자녀들 사진부터 세간살이까지 모든 걸 잃었다. 그러나 넋 놓고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마을 반장인 이씨는 4지구에서 함께 살아온 이웃들을 챙기느라 오전 내내 바쁘게 움직였다. 불이 난 집에 사는 주민 명단을 손에 쥐고, 이웃 한명 한명에게 전화를 걸어 안전을 확인했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소방당국이 동원한 포크레인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불이 난 4지구에는 90여 가구가 넘게 살고 있었다. 이 중 집이 불에 타 돌아갈 수 없게 된 이재민이 62명이다. 이들 대부분 내일부터 시작되는 설 연휴를 호텔 등 임시 숙소에서 맞이해야 한다. 30년째 구룡마을에 거주 중인 한 주민은 “화재로 집이 다 타니 스스로에게도 화가 나고 침통하다”며 “판자촌 삶 자체가 불안하고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또 “설 연휴를 집이 아닌 호텔에서 보내야 하니 답답하고 막막하다. 나중엔 친척들이나 자식들 집에 가야 할 텐데 미안해서 부탁하기도 어렵다”며 “생활 자체가 불에 타버렸다”고 했다. 주민 조태천(70)씨도 “집이 없으니 설 연휴를 생각할 여유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강남구청에서 지정해준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문제는 이 같은 비극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침울한 표정으로 화재 복구 현장을 오가던 주민들은 “불이 난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1975년부터 구룡마을 4지구에서 살았다는 박순식(78)씨는 “여기 사는 동안 큰 불만 여섯 번을 겪었다”며 “여기서 사는 삶이 어떤 건지 말로 다 못 한다”고 말했다.

20일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화재 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잔불을 정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다른 주민 역시 “전기선이 노후화해 스파크가 종종 튀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이 연로하고 대부분 연탄보일러를 사용해서 화재에 더 취약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올해는 수해도 겪었다. 지난해 8월 강남 지역을 덮친 폭우로 큰 피해를 보고, 100여명이 집을 떠나 임시 대피소에서 생활했다. 이들 중 일부는 지난 추석도 대피소에서 맞았다.

4지구 주민 이기순(89)씨는 “개인적인 자료이나 책도 다 사라지고, 옷도 지금 입고 나온 한 벌밖에 없다”며 “공동체가 사라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윤정민·김민정·이찬규 기자 kim.minjeong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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