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유괴범으로 체포된 대학생, 15년 전 사건의 진상

김상목 2023. 1. 2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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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유랑의 달>

[김상목 기자]

이상일 감독, 신작으로 돌아오다

이상일이라는 감독이 있다. 평범한 이름 같지만 그는 재일한국인 3세, '자이니치'다. 적잖은 재일교포 출신들이 일본영화계에서 활동 중이지만 일본영화 감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다 작년 11월 세상을 떠난 고(故)최양일 감독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영화판 메이저에 속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최양일 감독조차 일본식 이름을 병용하며 활동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작품에서 재일한국인 정체성이 딱히 두드러지진 않는다. 창작활동에 대한 선입견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작가적 의도라 넘겨짚어 본다. 하지만 한국인 이름 사용에 대한 단호한 고집과 그의 영화에서 꾸준히 확인되는 사회적 편견과 소수자 문제를 통해 이 감독은 결코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 왔었다.

감독의 데뷔작부터 꾸준히 대부분 작품들을 확인해왔다. 활동 전반기에는 2004년 < 69 >, 2006년 <훌라 걸스>처럼 결코 사회 기득권 주류가 아닌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비교적 낭만적 해피엔딩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선보였다. < 69 >는 격변기이던 68혁명 전후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급진문화축제를 열려는 청소년들의 왁자지껄 난장을, <훌라 걸스>는 쇠락한 탄광마을을 살리기 위해 하와이언 센터를 유치하려는 주민들의 사연을 코믹하게 담아내 2000년대 초반 일본 인디영화 열풍의 일익을 담당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상일 감독은 적절히 사회적 코드를 삽입한 준수한 상업영화 연출가로 자리 잡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감독의 영화경력은 2010년 <악인>을 기점으로 변모한다. 일본의 유명 작가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을 기반으로 실제로 회복 불가능한 범죄를 저지른 주인공의 후일담을 다루면서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개인의 심리와 죄의식 등을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차기작으로는 미국 수정주의 서부극의 상징과도 같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용서받지 못한 자>를 메이지 시대 초반 북해도로 배경을 옮겨 리메이크한다. 2013년 <용서받지 못한 자>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낙오된 동병상련 신세의 과거 적들과 지역 배경인 북해도 원주민 아이누의 수난 역사를 버무려낸 작업이었다. 역시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영상화한 2016년 <분노>는 현대 일본사회에 잠재된 사회모순과 개인들의 불신을 미스터리 스릴러 형태로 강렬하게 담아낸다. 끔찍한 살인사건 용의자를 추적하는 가운데 동성애나 주일미군에 의한 강간 등 까딱 잘못하면 선정성 논란에 휩싸이기 안성맞춤 소재들이 과감하게 노출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민감한 소재와 금기에 도전하면서 일본사회에 잠재된 문제와 극한적인 상황에 처한 당사자의 생존투쟁을 전개하는 감독의 중반 이후 경향은 2022년 등장한 신작 <유랑의 달>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2020년 일본 서점대상을 석권한 나기라 유의 동명 장편을 영화화했다. 원래 BL 장르를 주로 집필하던 원작자의 첫 번째 본격 정극소설은 소아성애와 스톡홀름 증후군, 결손가정과 사회적 낙인 등 예민한 쟁점을 쉽게 상상하기 힘든 극한의 상황을 통해 풀어낸다. 이상일 감독의 후반기 세계관과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는 젊은 배우들 중 연기력을 인정받는 주연배우들의 열연과 뛰어난 스태프들의 협력으로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낸다.

15년 전 사건에서 출발하는 이야기
 
▲ "유랑의 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왓챠, ㈜영화특별시SMC
 
영화가 시작된다. 10살 소녀 '사라사'는 어느 날 공원에서 대학생 '후미'와 우연히 만난다. 마침 비가 쏟아지자 후미는 비를 맞던 사라사에게 자기 우산을 내민다. 하지만 우산을 받아든 소녀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알아차린 후미는 사라사를 자기 거처로 데려간다. 그 곳에서 소녀는 몇 달간 마음 가는 대로 편하고 행복하게 보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곧 끝난다. 후미가 아동 유괴범으로 체포된 것이다. 그런데 사라사는 후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둘은 손을 꼭 쥔 채 잠깐 버티지만 끝내 후미는 끌려가고 사라사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납치범을 잡으러 온 경찰이나 사라사의 보호자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의아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사건은 명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사라사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자친구 '료'와 동거중이다. 대기업 정규직인 료는 다정하고 능력도 출중해 보인다. 둘은 장래를 약속한 사이다. 그런데 15년 전 사건이 워낙 파장이 컸다 보니 남자친구도, 직장 사람들도 그가 납치 피해자라는 걸 다 안다. 현재 시점에서 사라사는 끔찍한 사건에서 회복되어 건실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에선 15년 전 아동 유괴범은 어떻게 되었을까 간혹 궁금해 하곤 하지만 사라사는 굳이 입에 담거나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우연히 둘은 재회하게 된다. 범죄자로 규정되어 처벌을 받은 후미는 사건이 종결된 후 카페를 운영하던 중이다. 사라사는 자꾸 그곳을 찾지만 후미는 그를 못 알아보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어찌 잊을 수 있었으랴.

둘만이 공유하는 그 당시의 기억은 실은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많이 달랐다. 세간에선 소아성욕자인 '변태' 범죄자가 어린 소녀를 강제로 납치해 추행하려던 사건으로 규정하지만 실제 사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복잡한 진실을 이해하려 들거나 (가해자 VS 피해자 관계의) 둘이 재회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사라사에겐 남자친구가 있고, 후미 또한 애인이 있다. 15년이 지나 겨우 복구한 각자의 일상이 다시 무너질 위기에 처하고 사라사는 료, 후미는 애인 아유미와 갈등상태에 빠지고 만다. 다시 마주치지 않았다면 각자의 삶을 살았을 법도 하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버렸다. 이제 모든 상황이 15년 전 사건의 진상과 맞물리며 두 사람의 현재에 파문을 던진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공유하는 걸까?

'상식적 판단을 의심해보길 권하는 작가의 시선
 
▲ "유랑의 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왓챠, ㈜영화특별시SMC
 
<유랑의 달>은 '내가 알고 있는 게 과연 전부 다 옳은 것일까?' 라는 의문에 도전하기를 권하는 영화다. 이 작품 속에서 사라사와 후미 주변의 사람들은 둘의 관계에 대해 억측을 하지만 그들의 선입견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고 자연스럽다. 반면에 사라사와 후미 둘만이 공유하는 15년 전의 진상은 시나리오라 치면 빵점짜리일 뿐이다. 이걸 믿으란 말이냐 반발이 저절로 터질 만큼 개연성이 없다. 그런 조건이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가슴 깊숙한 곳에서 탄식이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

극단적인 상황은 현실의 관계를 고도로 압축해서 이를 접하게 된 이들에게 실존적 고뇌와 성찰을 유도하지만 어설프게 설정놀음에 의지하거나 남용하게 되면 안 쓰니 못한 결과를 종종 낳곤 한다. 특히 세상의 여러 단면들, 그중에서도 생각해봐야할 논란지점을 즐겨 다루는 독립예술영화가 그렇게 안일한 선택을 할 경우가 의외지만 적지 않다. 특별한 개연성 없이 마치 '깜짝 쇼' 벌이듯 자극적이고 숨 쉴 틈 없게 만드는 그런 부류는 사실 게으른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실제로도 '복잡한 세상'과 '미묘한 단면'은 사람들의 흔한 상상보다 훨씬 더 초월적인 경우를 낳곤 한다. 감독은 영화를 완성시키기 위한 가용 자원을 알뜰하게 꼼꼼히 잘 관리해 150분 내내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그 소용돌이는 강도가 제법 상당하기 때문에 심장이 좀 약하거나 연상효과에 예민한 사람들이라면 본 작품 관람에 주의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소아성애' 코드가 주인공들을 이해하는데 주요한 배경이 된다. 단순 누명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 부분은 15년 전 사건과 그들의 현재적 삶에 반영되는 셈이다. 그래서 영화는 종종 관음증에 가까운 긴장을 미묘하게 발산하곤 한다.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원작소설의 주제처럼 이상일 감독은 영화화를 통해 자신이 추구해온 인간성 탐구와 주류적인 시각의 전복을 꾀한다. 세상 일은 그렇게 무 자르듯 쉽게 단정하면 안 되며, 내 생각이 어쩌면 편견이 아닌지 두 번 세 번 숙고해봐야 한다는 태도다. 요즘처럼 모두가 다 불행해하는 세태에서 감독의 태도는 골치 아프게 사서 고생하고 쓸데없는 고민을 늘어놓게 만드는 것처럼 비칠 수 있지만 무척이나 소중한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원작과 영화 속 주인공들의 공유지점이 보편적일 순 없는 노릇이기에 격렬한 찬반논쟁은 의도될 수밖에 없겠다.

극단적 설정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배우 사용법
 
▲ "유랑의 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왓챠, ㈜영화특별시SMC
 
네 명의 남녀 주인공은 과거와 현재를 통해 얽히고설킨다. 한쪽에선 15년 전 강제로 헤어진 상처를 치유하려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 있고, 반대편에는 그 무모한 도전 때문에 자신들이 놓치고 싶지 않은 현재를 지키려 악다구니 쓰는 이들이 서 있다. 모두가 같이 행복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이런 복잡한 인간관계는 조금만 어긋나면 '막장 드라마' 수준으로 식상하게 비치기 딱 좋다. 그렇다면 치밀한 줄거리 전개와 이를 구현할 배우들의 연기력이 중요한데 이미 여러 수상과 평가로 검증된 원작소설에 기반을 둔 충실한 시나리오와 함께 젊은 연기자 중 실력으론 첫손 꼽힐 유망주들의 활약이 우려를 뛰어넘는다. 

'사라사' 역을 맡은 히로세 스즈는 이상일 감독의 전작 <분노>에서 활약한 후 감독과 재회했다. 현대일본영화를 상징하는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세 번째 살인>에 기용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던 당대 톱스타 연기자이지만 특히 이상일 감독과의 작업을 통해 빛을 발한다. 다른 누가 그 대신 사라사를 소화해낼 수 있을지 영화를 보고 나면 상상하기 힘들 지경이다. 부작용이라면 너무 압도적인 '배우의 얼굴' 때문에 소설 원작의 주인공 이미지를 별도로 떠올리기 힘들어져버렸다는 점이 문제일 정도다.

온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존재이자 사회에서 자신의 본질을 온전히 인정받기란 불가능한 '후미'를 소화한 마츠자카 토리 역시 마치 겨울의 앙상한 나무와도 같은 이미지를 뿜어낸다. 분명히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성향의 소유자인 후미는 제대로 표현하기 지극히 힘든 캐릭터다. 세상과 소통하기를 포기한 채 말라비틀어진 그가 영화 속에서 거듭 겪는 오해와 누명, 그리고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실체 때문에 괴로워하고 상처를 입는 찰나들은 보는 이들마저 무저갱으로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그런 후미의 현재 연인인 아유미는 사라사와 후미가 공유하는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의 공유를 본인의 선량함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존재로 대조를 이룬다.

흥미로운 건 제3의 주인공이자 사라사, 후미와 3각축을 형성하는 사라사의 남자친구 '료'다. 겉으로는 사라사의 과거나 불우한 조건을 개의치 않고 보듬어주는 일등 신랑감처럼 등장하지만 실제로 그의 사라사를 향한 애정 역시 뒤틀려 있다. 집착과 소유욕, 그리고 엇갈린 애정결핍이 뒤엉킨 그의 캐릭터는 사라사와 후미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사라사의 각성을 끌어내기도 한다. 15년간 응축된 둘에 비기진 못할지언정, 영화 속에서 료가 보이는 자극과 변화 역시 주요한 축을 구성하는 건 분명하다. 주역 급의 배우들 모두 그저 출중한 외모에 기댄 적당한 연기로 만족하지 않고 완벽히 캐릭터에 접근하려 했음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거장의 작업은 직접 확인하고 판단해야 제격
 
▲ "유랑의 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왓챠, ㈜영화특별시SMC
 
여기에 장면 자체를 떼어내어 액자로 소장하고 싶게 만드는 인상적인 신을 포착하는 촬영이 유독 눈에 띈다. 뜻밖에도 <유랑의 달> 촬영은 봉준호 감독의 <마더>와 <기생충>, 최근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를 담당한 홍경표 촬영감독이 맡았다. 이상일 감독의 물샐틈 없는 치밀한 연출에 홍경표 표 촬영이 결합된 시너지 덕분에 눈이 게으를 틈이 없다. 특히 이 영화 속에서 물과 달과 바람의 기운을 유심히 포착하면 마치 3D, 4DX 효과를 느끼듯 영화를 체험할 수 있을 테다. 정교한 연출력이 돋보이지만 예상외로 즉흥 촬영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홍경표 촬영감독의 '촉'을 이상일 감독이 신뢰한 결실이다.

그렇게 쉬이 만족하지 않는 열정과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된 배치가 조화를 이루며 '거장'이 되어가는 감독의 신작이 완성되었다. 영화가 막을 내리는 여운을 느끼며 이 작품 속 인물들이 부디 이제는 행복해지길 절로 기원하게 된다. 상투적 표현으론 형용하기 쉽지 않아 부족한 표현력에 자신을 한탄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무한 루프 마냥 끊어지지 않는 순환처럼 '아프다'. '슬프다'. '깊다'. '떨린다' 같은 감정들이 연쇄작용을 반복한다. 무척 감당하기 힘겹지만 영화가 가져다준 이 고통을 좀 더 붙잡고 싶게 만드는 찰나다. 원작소설이 더 궁금해진다. 역시 거장의 작품은 챙겨볼 가치가 있다.

이상일 감독의 영화는 계속 전진한다. 그러면서 점점 독해지는 중이다. 그의 영화는 세상의 힘들어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카메라로 비춰야 한다는 생각을 결코 멈추지 않고 실천하려는 입장을 고수한다. 결코 직설적으로 '답-정-너'를 설정하진 않지만 심사숙고해 결정한 원작의 함과 카메라 뒤편의 시선을 통해 하고픈 말은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어느 진영에 통째로 구속되려 하지 않으면서도 늘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에 조응하려 애쓴다. 이상일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그런 작가적 입장과 정확히 일치하며 세상과 인간에 대한 탐구를 거듭한다. 일관된 태도의 매력과 그 결실로 선보이는 매혹적인 이야기 때문에 이후로도 계속 그의 영화를 두근두근 기다릴 수밖에 없겠다.

<작품정보>

유랑의 달 Wandering, 流浪の月
2022|일본|드라마/미스터리
2023. 1. 18. 개봉|150분|15세 관람가
감독 이상일
촬영감독 홍경표
주연 히로세 스즈(카나이 사라사 역), 마츠자카 토리(사에키 후미 역)
출연 요코하마 류세이(나카세 료 역), 타베 미카코(타니 아유미 역),
시라토리 타마키(어린 카나이 사라사 역)
원작 나기라 유 [유랑의 달]
수입/공동배급 ㈜왓챠
배급 ㈜영화특별시SMC

2022 23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시네마 공식 초청
2022 14회 TAMA영화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신인남우상
2022 47회 호치영화상 남우조연상
2022 35회 닛칸스포츠영화대상 감독상
2022 야후써치어워드 영화 부문 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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