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랑과 앙리 마티스의 만남, 자스민 보누르
향수는 예술이다. 영감의 원천을 대담하게 해석하고, 어떤 재료를 쓸지 신중하게 엄선한 뒤, 이를 창조적이고 과학적으로 조합해 영원히 기억될 단 하나의 아름다운 향으로 승화시키는 조향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향수도 분명 음악이나 미술 못지않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828년부터 다양한 향수를 창조해 온 겔랑 하우스에도 향수는 단순히 향 이상의 예술 작품이다. 그것도 세상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열정을 바탕으로 하는! 라르 & 라 마티에르(L’Art & La Matie‵re) 컬렉션은 겔랑의 이런 신념을 집약한 결과물이다. 국내에 ‘오뜨 퍼퓸’이라는 컨셉트를 최초로 소개한 주인공이기도 한 이컬렉션에서 행복의 화가이자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앙리 마티스의 작품에서 영감받은 컬러플한 향 ‘자스민 보누르’를 새롭게 선보인다. 앙리 마티스의 증손자인 장 마튜 마티스(Jean-Matthieu Matisse)가 설립한 메종 마티스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추구한 행복과 환희의 가치를 세상에 전파하려고 하는 것. 자스민 보누르 출시를 기념해 현대 조향의 아버지이자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겔랑 하우스의 마스터 조향사 티에리 바세(Thierry Wasser)와 화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Q : 자스민 보누르는 앙리 마티스의 색종이 콜라주 작품 ‘천일야화 Les Mille et une Nuits’와 같은 다양한 ‘색채 팔레트’에서 영감을 얻은 향수라고 들었습니다. 마티스의 작품들이 당신에게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켰나요
A : ‘춤’ ‘음악’ ‘블루 누드’ 등의 작품은 다채로운 색채로 우리들을 압도합니다. 말년에 손가락 관절염에 걸린 앙리 마티스는 더 이상 붓을 잡을 수 없음에 절망하는 대신 맹렬하게 들끓던 화폭을 향한 열정으로 가위와 색종이를 들었고, 세상을 뜨기 3년 전 ‘천일야화’를 탄생시켰죠. 앙리 마티스 예술세계의 본질이 5~6막에 걸쳐 연극처럼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층층이 향의 서사가 펼쳐지는 향수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Q :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천일야화’를 검색해 봤습니다. 수많은 컬러의 색종이 조각에서 어떻게 자스민이라는 메인 원료를 선택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A : 앞서 언급했듯 ‘천일야화’는 한 폭 한 폭마다 고유의 개성이 있으면서 동시에 이것들이 한데 만나 압도적인 행복감과 기쁨을 선사하는 콜라주 작품입니다. 프랑스 북부에서 성장한 마티스가 그 빛을 따라 남부로 갔잖아요? 자스민의 섬세하고 가녀린 흰 빛깔이 저에겐 따뜻한 남국의 기쁨처럼 느껴졌어요. 자스민이야말로 따뜻한 남쪽에서 가장 강력한 향과 빛을 발하는 꽃이라는 사실이 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Q : 많은 향수 브랜드가 자스민을 향의 원료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자스민 보누르에 들어간 자스민은 무엇이 특별한가요
A : 프랑스 남부의 그라스, 이탈리아 남부의 칼라브리아, 인도 남부의 타밀나두에서 얻은 ‘그랜디플로럼 자스민’과 ‘삼박 자스민’을 조합해 사용합니다. 그곳의 자스민 재배자들은 겔랑의 오랜 친구들이죠. 원료에서 에센스를 추출하는 과정부터 향수를 제조하기까지 겔랑은 모든 프로세스를 엄격하게 통제합니다. 겔랑만의 공장도 있어요. 겔랑이 사랑하는 자스민은 그래서 특별합니다.
Q : 자스민 보누르에서는 자스민뿐 아니라 살구와 바닐라 같은 달달한 내음도 풍겨요
A : 앙리 마티스가 평생을 추구한 색채와 빛, 그 빛을 내뿜는 새하얀 자스민에 대해 앞서 얘기했죠. 그러나 빛은 레드와 그린, 블루, 즉 RGB의 혼합입니다. 자스민만 논한다면 우리는 단일 색에 머물게 됩니다. 때문에 대비되는 또 다른 색과 만나야 자스민의 빛이 더욱 두드러질 수 있습니다. 자스민 보누르에 담긴 애프리코트와 오렌지, 아이리스와 바이올렛 노트 등이 이 역할을 해주고, 이를 통해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프랑스 남부의 빛을 향기로 구현한 겁니다.
Q : 보누르(Bonheur), ‘행복’이라는 단어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당신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건
A : 사람을 만나는 데서 기인하는 기쁨. 델핀 젤크(Delphine Jelk)를 비롯해 겔랑의 조향 팀에서 함께 작업하며 창작의 고통마저 함께 나눕니다.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게 매우 고독한 활동이라 인간관계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자스민을 비롯해 겔랑 향수에 들어가는 고귀한 원료를 얻기 위해 전 세계에 있는 농장을 방문해 재배자들과 관계를 맺는 것 역시 저에게 행복감을 줍니다.
Q : 팬데믹이 그 행복을 앗아가지는 않았나요
A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팬데믹이 꼭 그리 나쁜 경험만은 아니더군요. 가족과 함께 지내며 맛있는 요리를 먹는 날이 이어졌는데, 또 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Q : 겔랑이라는 유서 깊은 하우스의 최고 조향사라는 직책, 말만 들어도 엄청난 부담감이 느껴집니다
A : 의외로 겔랑의 유산은 저에겐 그리 큰 부담이 아닙니다. 딛고 올라가는 탄탄한 발판처럼 느껴지는걸요. 현재 제가 몸담고 있는 겔랑은 1828년부터 향수를 만들어왔습니다. 1200개 이상의 향수가 태어났고, 그중 90%는 더 이상 판매되지 않지만 제조 공식으로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무려 19세기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강한 연결성을 지닌 메종은 겔랑 말고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겔랑 향수라는 역사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편입돼 그 일부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Q : 당신이 정의하는 겔랑 라르 & 라 마티에르란
A : 향수를 왜 뿌리나요? 나를 위한 향, 나를 잘 표현해 주는 향을 찾고, 그 향수를 뿌리는 과정에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 아닌가요? 좋은 향이 나면 스스로 아름다워졌다는 생각이 들고, 그로 인해 자존감이 높아지며, 결과적으로 행복해집니다. 라르 & 라 마티에르를 정의할 때 얼마나 고귀하고 희귀한 원료를 사용했는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진 않아요. 그건 겔랑이라면 당연하니까요. 라르 & 라 마티에르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한 향수이자, 스스로에게 아름다울 자격을 부여하는 향수입니다.
Q : 마지막으로 엉뚱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앙리 마티스가 환생해 자스민 보누르 향을 맡는다면 뭐라고 할까요
A : 영화 〈빽 투 더 퓨쳐〉가 생각나는군요(웃음). ‘춤’ ‘음악’ ‘블루 누드’ 등 위대한 작품을 남긴 앙리 마티스는 노인이 돼 병에 걸렸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대신 가위와 색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작품이 매우 커서 단상 위에 올라가 작업하기도 했죠. ‘천일야화’를 만든 앙리 마티스는 분명 ‘아이’였습니다. 신체적으로는 나이가 들었을지라도 내면에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유쾌한 아이의 정신과 역량, 힘이 있었던 겁니다. 만약 이 ‘아이’가 자스민 보누르를 맡는다면 감히 그 기쁨과 빛, 행복의 향기에 감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스민 보누르 향이 별로라며 청소하는 아줌마에게 줘버렸을지도 모르죠(웃음). 농담입니다! 밝고 찬란한 빛을 표현한 향이기에 프랑스 남부의 빛을 좋아하고 기쁨과 환희를 추구한 그가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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