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 삼킨 불 "팬티만 입고 달려"…설 앞둔 구룡마을 날벼락

문희철, 김민정, 우수진 2023. 1. 2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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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집도 다 탔어요?”
“속상하니까 물어보지 마.”

20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민들은 매캐한 연기를 피해 코를 막고 서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급하게 집에서 빠져나왔는지 슬리퍼나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도 보였다.

이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곳엔 슬레이트와 타다 남은 시커먼 목재 골조가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잔화를 정리하는 소방관들 사이로 희뿌연 연기가 밤안개처럼 솟아올랐다.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4구역 주민 신모 씨가 본인의 집이 불타는 모습을 촬영해 중앙일보에 제보했다. 사진 신씨 제공


“내 집 불타는 모습 쳐다만 봤다”


소방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 27분경 구룡마을 4지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마는 약 4시간 동안 44가구를 태우고 같은 날 오전 10시 10분쯤 잡혔다. 인명피해는 없고, 500여명이 긴급 대피했다. 주민들은 "설 명절을 앞두고 날벼락을 맞았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김민정 기자
불이 처음 난 구룡마을 4지구에 거주하는 신모(76) 씨는 “새벽에 성경을 읽으려고 형광등을 켰더니 자꾸 불이 깜빡깜빡 점등·소등을 반복하면서 지지직거렸다”며 “이상해서 밖에 나가봤더니 아랫집 사는 아저씨가 맨발로 팬티만 입고 뛰어다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배낭 하나만 달랑 둘러매고 뛰쳐나온 신씨는 “뜨겁고 무서워서 멀리서 멍하니 20년 넘게 살던 집과 모든 살림살이가 불타는 모습을 사진으로만 찍고 있었다”며 “집이 불타는 내내 그걸 쳐다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본인의 집이 화재로 전소한 구룡마을 주민 다리에 묻어있는 흙뭉치. 그는 급박하게 빠져나오느라 베낭 하나만 짊어지고 나왔다고 한다. 문희철 기자

서울에 남은 마지막 판자촌인 구룡마을은 비닐과 나무판자를 덧대 만든 임시 가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 곳에서 불이 나면 줄줄이 불똥이 옮겨붙기 쉬운 구조다.

특히 겨울 한파에 대비해 솜뭉치를 지붕과 건물 곳곳에 두르고,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판잣집 내부를 비닐로 두르면서 화재가 삽시간에 번졌다. 비닐은 화재가 발생하면 공기 중에 연소하기 쉬운 가연성 물질이다.

세간은 있는데 집은 좁다 보니 골목 곳곳에 생활 집기를 내놓는 경우도 많다. 액화석유가스(LPG)통이나 연탄 등을 골목에 두고 사용한다. 이런 분위기는 소방차가 화재 현장으로 진입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강남구청이 제공한 호텔 3층에 입실한 한 구룡마을 이재민은 “소방차가 새벽에 도착했지만, 현장에서 호스가 얼어서 물이 안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며 “안 되니까 나중에 헬기가 공중에서 물을 뿌리더라”고 말했다.


11시 36분 완진…이재민 62명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에 대해 현장에 소방 관계자가 설치한 재난 발생 현황 상황판(왼쪽 하단). 김민정 기자

본인 집이 전소했다는 구룡마을 4지구의 또 다른 주민도 “원래 친척 집에 갔다 오려고 했는데, 이렇게 난리여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화재가 난 구룡마을 호텔 로비에서 칫솔 등 생필품을 지급받고 있다. 강남구청은 주민들에게 호텔을 제공했다. 문희철 기자
구룡마을 화재는 이날 오전 11시 36분 완전히 진화했다. 현장에는 소방 197명과 경찰 320명, 지방자치단체 300명 등 총 918명이 동원됐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광호 서울경찰청장도 현장에서 상황을 점검했다. 소방당국은 구룡마을 곳곳에 남아있는 잔불을 진화 중이다. 이재민 62명을 포함해 구룡마을 4·5·6지구 일부 주민은 강남구에 있는 호텔 4곳에 임시로 머무르고 있다.

신용호 강남소방서 행정과장은 “가연성 합판으로 만들어진 구룡마을 건물은 화재에 취약한 소재”라며 “정확한 화재 원인은 현재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희철·김민정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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