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 삼킨 불 "팬티만 입고 달려"…설 앞둔 구룡마을 날벼락
“아저씨 집도 다 탔어요?”
“속상하니까 물어보지 마.”
20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민들은 매캐한 연기를 피해 코를 막고 서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급하게 집에서 빠져나왔는지 슬리퍼나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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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불타는 모습 쳐다만 봤다”
소방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 27분경 구룡마을 4지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마는 약 4시간 동안 44가구를 태우고 같은 날 오전 10시 10분쯤 잡혔다. 인명피해는 없고, 500여명이 긴급 대피했다. 주민들은 "설 명절을 앞두고 날벼락을 맞았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배낭 하나만 달랑 둘러매고 뛰쳐나온 신씨는 “뜨겁고 무서워서 멀리서 멍하니 20년 넘게 살던 집과 모든 살림살이가 불타는 모습을 사진으로만 찍고 있었다”며 “집이 불타는 내내 그걸 쳐다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에 남은 마지막 판자촌인 구룡마을은 비닐과 나무판자를 덧대 만든 임시 가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한 곳에서 불이 나면 줄줄이 불똥이 옮겨붙기 쉬운 구조다.
특히 겨울 한파에 대비해 솜뭉치를 지붕과 건물 곳곳에 두르고,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판잣집 내부를 비닐로 두르면서 화재가 삽시간에 번졌다. 비닐은 화재가 발생하면 공기 중에 연소하기 쉬운 가연성 물질이다.
세간은 있는데 집은 좁다 보니 골목 곳곳에 생활 집기를 내놓는 경우도 많다. 액화석유가스(LPG)통이나 연탄 등을 골목에 두고 사용한다. 이런 분위기는 소방차가 화재 현장으로 진입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강남구청이 제공한 호텔 3층에 입실한 한 구룡마을 이재민은 “소방차가 새벽에 도착했지만, 현장에서 호스가 얼어서 물이 안 나온다는 말을 들었다”며 “안 되니까 나중에 헬기가 공중에서 물을 뿌리더라”고 말했다.
11시 36분 완진…이재민 62명
본인 집이 전소했다는 구룡마을 4지구의 또 다른 주민도 “원래 친척 집에 갔다 오려고 했는데, 이렇게 난리여서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신용호 강남소방서 행정과장은 “가연성 합판으로 만들어진 구룡마을 건물은 화재에 취약한 소재”라며 “정확한 화재 원인은 현재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희철·김민정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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