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앞두고 강남 구룡마을 덮친 화마… “여름엔 물, 겨울엔 불”

이의재 2023. 1. 2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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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앞둔 20일 오후 12시쯤, 서울의 대표적인 판자촌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민 이모(58)씨는 불이 꺼진 집을 보고 돌아와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여름 물난리로 고생을 겪었던 구룡마을은 이날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불난리'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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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잿더미가 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소방대원들이 잔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설 연휴를 앞둔 20일 오후 12시쯤, 서울의 대표적인 판자촌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민 이모(58)씨는 불이 꺼진 집을 보고 돌아와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새벽부터 덮친 화마로 이씨의 집은 뼈대만 남고 송두리째 타버린 상태였다.

이씨가 사는 구룡마을 4지구는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다 돌아온 언덕 위에는 챙겨 나올 세간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씨는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동네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다 타버릴 줄은 몰랐다”며 “이번 설은 꼼짝없이 낯선 방에서 지낼 모양”이라고 한탄했다.

지난 여름 물난리로 고생을 겪었던 구룡마을은 이날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불난리’에 휩싸였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27분쯤 구룡마을 4지구 인근에서 처음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은 오전 6시39분과 7시26분 각각 대응 1·2단계를 발령하고 대원 197명과 소방장비 59대를 투입해 진화에 나섰다. 이 밖에도 구청·군·경찰 721명이 현장에 투입돼 작업을 도왔다.

20일 오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지구에서 화재가 발생해 불길이 치솟고 있다. 연합뉴스

화마를 피한 3지구 주민 이찬이(68)씨는 “아침에 눈을 뜨자 소방차가 골목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매캐한 냄새에 깨서 바깥을 보니 이미 출동 차량 수십 대가 골목에 가득했다는 것이다. 인근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이씨는 이날도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일터에 나섰다가 돌아왔다. 그는 “불이 번지지 않기만을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소방은 화재 발생 4시간 만인 오전 10시10분쯤 초진에 성공하고 대응 1단계를 해제했다. 이후 1시간쯤 뒤인 11시46분쯤에는 완전히 진압을 마쳤다. 소방은 이번 화재로 2700㎡의 면적이 소실되고 4지구 주택 40여세대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한때 거주 주민 450여명이 긴급 대피하기도 했다. 화재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4지구 일대가 잿더미로 변해 있다. 연합뉴스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 60명은 이날 오전부터 구청이 마련한 임시 거처 4곳으로 차례로 이동했다. 하지만 설날만 기다리던 김영순(72)씨의 명절 준비는 이미 물거품이 된 뒤였다. 이날 오전 구청에서 마련한 숙소에 들어간 김씨는 “손자들이 오면 세뱃돈으로 주려고 50만원을 뽑아 뒀고, 제사를 지내려고 시장까지 전부 봐 뒀는데 그걸 모조리 두고 나왔다”며 “이제는 지낼 곳까지 새로 구해야 하는데 울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부터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주요 정치인들이 현장을 찾아 주민들을 위로했지만 이재민들의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임시 숙소 배정을 기다리던 주민 A씨는 “높은 사람들이 와도 이불이나 몇 짝 주고 가지 진짜 도움을 주진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며 “매번 불이 나고 물난리가 나고 정치인이 오지만 이곳은 달라지는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구룡마을은 지난해 8월에도 집중호우로 주택이 침수되고 무너지면서 1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던 재난 빈발 지역이다. 지난 수해 때 집 절반을 못 쓰게 됐던 주민 강모씨는 이번에는 운좋게 화마를 피했다. 하지만 주민 입장에서는 불안감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것이 강씨의 설명이다. 그는 “이곳은 여름에는 물이 무섭고 겨울에는 불이 무서운 동네”라며 “이제는 밤에도 옷을 입고 잠드는 게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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